[창간 26주년 기획]
가계빚 1800조…소득주도성장 기조 잃고 표류
시장 자율성 억누르는 ‘안정화 원칙’ 규제 족쇄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부채 주도에서 소득 주도로의 성장 전환’으로 대변되는 문재인 정부의 금융정책이 끝물로 접어들고 있다.

서민·취약계층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금융지원 확대, 금융소비자 보호 체계 강화 등 가계부채 위험 해소를 위해 다양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갔으나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변수로 각종 난관에 부딪힌 모습이다.

금융위기 극복을 목표로 촘촘한 그물을 짠 정부와 이를 거친 파도에 내던진 은행들은 어떤 결과를 거둬들였을까.


초강력 총량제에도 꿈쩍 않는 빚덩이


지난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시장 자율을 강조했던 이전 정부와 달리 적극적인 시장 개입으로 소비자를 보호하고 금융시장 안정을 꾀한다는 기조를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소득 주도 성장을 위한 가계부채 위험 해소라는 국정과제에 맞춰 도입한 ‘가계부채 총량제’다.

가계부채 총량제란 총수입의 일정 상한선 이상으로 부채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연봉 5000만원인 직장인이 있다면 부채는 이의 150% 수준인 7500만원 까지만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부채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가장 먼저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합리화를 위한 대출 감독규정을 개정(2017년 8월)했다. 또 지난 2018년 3월부터는 상환능력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해 가계부채 연착륙을 유도했다.

이후로도 가계부채 대책 후속 조치 및 가계대출 동향 점검을 통해 금융권 여신 관리·감독을 지속해서 강화했고, 전년 말 대비 가계부채 증가율은 지난 2016년 11.6%에서 2017년 8.1%, 2018년 4.9%, 2019년(3분기) 3.0%로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코로나19가 창궐하며 가계부채 문제는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제적 불황을 이겨내기 위한 생계형 목적의 긴급대출이 급격히 늘었고 저금리 등 완화적 금융여건에 부동산·가상화폐·주식 투자 열풍이 불러온 ‘빚투(빚내서 투자)’, ‘영끌(영혼까지 끌어서 대출)’ 붐까지 겹치며 가계부채는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말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1805조9000억원으로 전 분기 말 대비 41조2000억원 늘며 2분기 기준 역대 최고 증가폭을 기록했다.

당국은 가계부채 고삐를 다시 죄기 위해 금융권에 더욱 강력한 통제책을 주문했다. 지난해 말에는 은행권 수장들을 불러 가계대출 관리계획을 제출받아 올해 증가율을 5~6%대로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은행법 제34조에 따르면 은행은 당국이 정한 경영지도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대출 리스크 관리 역시 경영지도 대상에 포함돼 있다. 경영지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당국은 이익 배당 제한 등 경영 개선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은행들이 당국과의 ‘약속’을 준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요 시중은행들 대부분은 이미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이 목표치(5~6%) 턱밑까지 도달한 상태다. 은행별로 보면 지난달 말 기준 NH농협은행은 7.14%로 목표치를 넘어섰고, 하나은행이 5.23%, KB국민은행이 5.06%로 목표치에 이르렀다. 우리은행(4.24%)과 신한은행(3.16%)은 아직 5% 미만이지만 안심할 순 없는 수준이다.

은행들은 올해가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대출 문턱을 높이고 있다. 지난 6월 고신용자에 대한 신용대출을 시작으로 마이너스 통장과 집단대출의 금리가 올라가고 한도가 대폭 축소된 데 이어 일부 은행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신규 판매를 연말까지 전면 중단하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가계대출 총량 관리’라는 목적 아래 대출 한파를 맞닥뜨린 실수요자들의 불만이 터지고 있지만, 당국은 내년까지 가계부채 관리 강도를 높인다는 방침을 고수 중이다. 경제 불황에 금융불균형까지 심화하고 있는 현 상황에선 더 엄격한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정책적 판단이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 6일과 국정감사장에서 이달 중순 발표할 가계부채 추가대책에 강도 높은 대출 죄기 대책을 포함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추가대책으로는 내년 7월 적용을 예고했던 DSR 규제 강화 시기를 앞당기는 방안이 거론된다. 현재 DSR 규제는 전 규제지역에서 6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의 담보대출이나 1억원이 넘는 신용대출이 적용 대상이다. DSR 규제가 강화되면 총대출이 2억원을 넘어서는 대출까지 적용 대상이 확대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가계부채 증가는 중장기적으로 가계소비에 부정적이며 주택가격 상승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로 부정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며 “당국의 위험성, 시급성 인식과 적극적인 가계부채 대응 의지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다만 “가계부채에 대한 급격한 축소를 시도한다면 신용 리스크와 경기침체 초래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며 “금융불균형 조정 정책이 오히려 가계부담을 증가시켜 정책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유의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중금리 구원투수 인뱅, 4년째 성장통


우리나라 대출 시장에서 고신용자는 저금리를, 저신용자는 고금리를 책정받는데 중신용자들이 중금리를 못 받는 ‘신용 양극화’ 현상이 고질적 문제로 제기된다.

최근 5년(2016~2020년) 금융권 대출금리를 보면 고신용 구간이 크게 줄어든(8.4%→6.6%) 반면, 중신용 구간은 별다른 변화(15.9%→15.4%)를 보이지 않았다.

중신용 구간은 저신용층 구간(18.3%)과도 차이가 크지 않다. 저금리 기조 지속과 신용대출 확대에 따른 혜택이 고신용자에게 집중되는 반면, 10%대 안팎의 중금리 시장 부재로 중·저신용자들이 20%대의 고금리 시장으로 몰리는 ‘금리단층’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중금리대출에 금융권의 신용평가모델이 적절히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며 정책을 통해 ‘시장 만능주의’를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중금리대출 활성화라는 특명을 안고 출범한 인터넷전문은행이 새로운 플레이어로서 시장에서 혁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 시행 등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대와 달리 인터넷은행이 시중은행과 마찬가지로 고신용자 위주 대출에 집중하는 영업행태를 보였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선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가 시장에 등장한 지 4년여가 지났음에도 불구 중금리대출 공급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지난해 말 기준 인터넷은행의 중·저신용자(신용등급 4등급 이하) 신용대출 비중은 12.1%로 은행 전체 평균 24.2%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금융위는 중금리대출 활성화 계획의 성공을 위해 인터넷은행에 직접 채찍을 휘둘렀다.

올해 초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에 중금리대출 비중 확대 계획안 제출을 요구했으며, 계획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정기적으로 현황을 공시하고 미이행 시 신사업 인허가에 불이익이 되도록 고려한다는 방침이다.

당국의 엄포에 카카오뱅크는 연말까지 중·저신용자대출 비중을 전체 가계신용대출의 20.8%까지, 케이뱅크의 경우 21.5%까지 늘리기로 했다. 이달 출범한 토스뱅크는 올해 말까지 중금리대출 비율을 34.9%까지 달성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카카오뱅크는 최근 공격적으로 중·저신용자 고객 확대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한도를 확대하고 금리를 인하하는 것뿐 아니라 대출 첫 달 이자를 면제하는 정책도 펼쳤다. 고신용자에 대한 대출억제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신용자 신용대출의 한도를 개인 연봉 상한으로 제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는 중이다.

케이뱅크 역시 정책 중금리대출인 사잇돌대출을 출시하고 중·저신용자대출 상품의 한도 상향 및 승인구간 확대 등 중금리대출 판매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토스뱅크는 금융 및 비금융 대안 데이터를 포괄하는 토스뱅크의 신용평가모형을 기반으로 인터넷은행 본연의 미션인 중신용대출에 집중하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는 계획이다.


포용금융에 담긴 은행 부담 한 스푼


문재인 정부는 금융 양극화 방지를 위한 ‘포용적 금융 확대’에도 주력했다.

포용적 금융이란 금융 기회가 제한되는 저소득, 저신용 취약계층과 제도권 금융시스템에서 탈락한 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잘 사는 경제 구축에 필요한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의 핵심키워드였던 ‘창조경제’를 지우고 ‘포용’ 색깔을 덧입힌 금융 상품·서비스 출시에 공을 들였다.

법정 최고금리 인하(27.9→24→20%)를 추진하고 정책모기지(보금자리론, 디딤돌대출, 적격대출) 공급을 확대했으며 ‘햇살론 유스’, ‘햇살론뱅크’ 등 신규 서민금융상품 출시, 민간은행 유한책임대출 목표 확대 등 서민층 금리부담 완화에 노력했다.

금융위는 지난달 29일 ‘서민의 금융 생활 지원에 관한 규정’도 의결했다. 전날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서민금융법 시행령 개정안’의 후속 조치로, 안정적인 정책서민금융 재원 마련을 위해 고안된 방안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상호금융·저축은행뿐 아니라 은행, 보험사, 여신전문회사 등 가계대출을 취급하는 모든 금융기관으로 출연 범위를 넓히 규모도 연간 18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늘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금융위는 이달부터 전년 신용대출 잔액 규모 중 0.03%에 해당하는 정책서민금융 출연금을 금융회사에 부과한다. 은행권의 지난해 신용대출 잔액 규모는 약 350조원이며 출연금으로 약 1050억원을 부담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서민금융진흥원·신용회복위원회가 정부기관 등에 요청할 수 있는 행정정보의 종류·범위 등을 구체화했다”며 “이는 서민금융 이용자와 채무조정 신청자의 서류 제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다만 당장 올해부터 매년 1000억원 규모의 서민금융 관련 재원을 의무적으로 내놓게 된 은행권의 속내는 복잡하다.

서민금융법 개정은 사실상 ‘이익공유제’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결국 서민금융 복지를 사기업인 은행에 떠맡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서민금융 재원 출연에 대한 정부의 논리는 은행이 대출 사업을 통해 이익을 내니, 공공을 위해 일부를 환원하라는 것인데 엄밀히 따지면 세금으로 감당해야 할 복지 재원 부담을 은행에 전가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국은 이 같은 비판에 금융권과 합의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합의했다고 보기엔 은행이 규제산업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부담을 준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계속 가계대출이 급증할 텐데, 은행을 포함한 금융사들의 부담도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소윤 기자 asy2626@kbank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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