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 정벌에서 접한 중국, 우리는 사행단이 첫 만남
현재의 무화과, 1971년 이후 과수농가가 상업 육성

무화과나무는 서역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중국으로 길을 나섰던 사신들의 기행록에서 빠짐없이 무화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생김새의 신기함과 맛에 무척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전남 순창의 한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다.

“나무 중에 꽃 없이 열매를 맺는 것이 있으니 무화과이다. 내가 일찍이 연경 시장에서 사 왔는데, 열매가 잎 위에 달렸고 맛이 달콤하였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의 저작 《임하필기》에 기록돼 있는 무화과 관련 내용이다. 책이 탈고된 것은 1871년이나 이유원이 사행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것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따라나선 1841년의 일이다.

무화과는 지중해와 서아시아가 원산지다. 기독교는 물론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의 상징물로 등장할 만큼 무화과는 지중해와 서아시아 등에서 일상적으로 재배돼 먹던 과일이다. 이것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장건의 서역 정벌이 있었던 한나라 무제 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남쪽 지방은 따뜻한 기후여서 무화과를 많이 기른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 사행길에 낯선 과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각종 기록에 무화과를 남겼다. 이유원의 ‘달콤하다’는 시음평도 사행길에서 맛봤기 때문에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모두 무화과 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화과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적혀 있는 기록을 살펴보자. 사행단이 책문을 넘어서 중국 땅(봉황성)에 들어선 뒤 어느 선비의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된다.

여기서 박지원은 나무 화분에 심어진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보게 된다. “잎은 동백 모양이고 열매는 탱자와 같았다. 이름을 물어보니 무화과라고 한다. 열매는 모두 쌍으로 나란히 달렸고,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열리므로 이름을 무화과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1780년 청의 건륭제 칠순 축하 사절에 같이 수행원으로 따라나섰던 노이점도 당시의 사행 기록을 《수서록》에 남겼다. 그런데 박지원처럼 그도 직접 맛을 보지 못하고 전해 들은 무화과 이야기만 기록했다.

하지만 무화과를 맛본 사람들의 맛에 대한 기억은 참 오래간 듯하다. 1789년(정조 13년)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길을 나섰던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영보는 14년 뒤인 1803년 사은사의 정사로 길을 나서는 이만수에게 환송연을 열어주고 시를 읊었다.

시의 말미에 그는 “발효하면 잘 익은 자두와 같은 과실”을 “명년엔 마주하고 맛볼 수 있으려나”라고 적고 있다. 귀국할 때 무화과를 가져올 수 있으면 맛이라도 보게 가져와 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화과 열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무화과 열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무화과의 철이 돌아왔다. 빠른 경우에는 8월부터 맛을 볼 수 있는 무화과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행길에서 맛본 무화과를 어떻게든 조선 땅에 가져오려고 갖은 노력은 펼쳤던 듯싶다.

앞서 소개한 서영보의 기록처럼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광려의 기록에도 무화과를 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의 문집인 《이참봉집》(1805년 간)에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시가 두 개 수록돼 있다.

1722년 사행에 나서는 윤동승에게 무화과나무를 구해올 것을 요청하는 시였다. 그리고 가져다준 뒤에는 고마움을 표하는 답시를 보내기도 했다. 즉 18세기 초에 조선의 관리들은 무화과나무를 어떻게든 이 땅으로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이 읽은 책 중에 중국 명나라의 왕상진이 쓴 《군방보》가 있다. 이 책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꽃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무화과를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열매가 달고 많이 먹어도 몸이 상하지 않으며 노인이나 어린이 모두 먹을 수 있고 감처럼 말려서 먹기도 하며, 6월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오랜 기간 맛을 볼 수 있고, 열매 수확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다른 나무에 비해 바로 1년 만에 열매가 열리고, 잎은 약으로 사용하며 서리가 내린 뒤의 다 익지 않은 열매는 따서 절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황식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부연한다. 그러니 조선의 실학자들의 눈에 무화과가 그냥 스쳐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들어온 무화과가 따뜻한 남쪽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요즘 먹고 있는 무화과는 이때 심어진 나무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1971년 전남 영암에 과실 수확을 목적으로 일본에서 개량종 무화과나무를 가져온 이후다. 단맛의 육질도 좋지만, 무화과는 단백질 분해와 항산화 등에 좋다고 한다. 제철 맞은 무화과를 즐길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계절이다.

대한금융신문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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