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란<1>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학문은 해볼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맹수 앞에서 가만히 돌을 쥐는 동작처럼 필연적인 실천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문학 사숙 <건명원>의 원생 모집 광고 카피이다. 30명 모집에 900명이 몰렸다는 이 사숙에는 인문학 열풍 속에 주가를 높이고 있는 서강대 최진석, 서울대 배철현, 국민대 김개천, 카이스트 김대식 등 8명의 인문학자와 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세상을 삐딱하게 볼 수 있는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 오직 그 것 뿐이다.

이 카피를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른 인물들이 있다. 먼저 필리스티아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엘라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인 때가 있었다. 필리스티아의 무장은 머리에 청동 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을 입은 거인 골리앗이었으며 이스라엘은 초대 왕 사울마저 겁에 질려 있었다.

이때 어린 양치기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자처한다. 왕이 주는 갑옷도 마다하고 개울가에서 찾은 5개의 맨들맨들한 돌과 고작 무릿매 줄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선다. 이 순간 다윗의 마음은 <건명원> 카피에서처럼 맹수 앞에서 가만히 돌을 쥐는 행동과 같았을 것이다. 손바닥에는 땀이 차올랐을 것이며, 동작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필사의 한 방으로 골리앗을 물리친다.

두 번째는 트로이 평원에서 마주 선 영웅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다.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며 원수 헥토르와 맞서기 위해 갑옷을 다시 걸치고 무장을 한다. 아가멤돈의 횡포로 자신의 전리품을 빼앗기자 전투를 태업했던 그가 다시 분노의 이름으로 전장에 나선 것이다.

다른 한 편에는 트로이의 국민적 영웅, 타고난 용맹은 없어도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련된 용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헥토르. 그가 아킬레우스와 마주친 순간이 아마도 맹수 앞에서 돌을 쥐는 긴장감 그 자체였을 것이다.

맹수 앞에서 돌을 쥐는 순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기 위해 취해야 하는 필연적 실천이다. 온 신경을 집중시켜 동작 하나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인문학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인간으로 살고자 취해야 하는 필연적 실천행위인 것이다. 익숙한 것과는 단호하게 헤어지고 기꺼운 마음으로 낯섦을 만나는 순간이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생존에 성공한 인간들은 항시 낯섦을 선택했다.

뗀석기에서 간석기를 선택했을 때, 그리고 청동기, 철기를 각각 선택했을 때, 우리는 새롭게 진화하였고, 도구적 측면에서 진보했다. 빗살무늬토기에서, 무문토기, 그리고 도기, 자기로 넘어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증기선이 등장했을 때도 익숙함과 결별했다.

3선의 은행 창구가 2선으로 바뀔 때, 온라인 계좌 간 거래가 가능했을 때, 돈을 입출금할 수 있는 자동화기기가 등장했을 때, 은행은 모두 낯설어 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행 소유 자동화기기 마저 없는 은행이 등장했고 아예 오프라인 점포마저 없는 은행도 나왔다. 그런 점에서 국내 은행들은 자문하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무엇이 익숙한 것이고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익숙함에 머물렀던 인간이나, 민족은 항시 낯섦을 선택한 인간과 민족에게 패배하였다. 그래서 인문학은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느끼는 학문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맹수와 맞선 사람이 당신이라고 가정하자. 그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예리한 돌조각을 집는다. 이때 허둥거릴 것인가? 손에 땀이 차오른다. 여기서 결정적 순간을 찾은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인문학에 돌입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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