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은 압축 성장에 필요한 금융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고령화에 따른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는 기존 조달측면의 금융중개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대신 은퇴 후 적정한 소비를 위해 급속하게 늘어나는 연금자산의 운용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운용측면의 금융중개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 금융시스템은 기존의 ‘건전성’ 관점을 넘어 고령화, 저성장과 같은 경제환경의 근본적인 변화 속에서 ‘효율성’ 관점의 재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지는 고령화·저성장 시대의 금융의 역할과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사례를 차례로 살펴보며 국내 금융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근로소득보다 금융·연금소득 중요도 ↑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 발전 논의는 시스템 리스크, 금융소비자보호 등 금융안정과 신뢰회복을 위한 규제체계 정비에 집중돼 왔다. 인구 고령화, 저성장, 저금리 등 실물경제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중개 시스템에 요구하는 역할 변화에 대해서는 논의가 풍부하지 못했다.

인구 고령화는 금융시스템의 근본 변화를 요구하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 특히 고령화는 소비함수의 변화를 야기하며 금융자산과 연금자산 축적을 촉진하고 노후소득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금융중개 운용측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고령화가 연금제도의 발전을 통해 금융중개의 운용사이드 변화를 이끈다는 점에서 고령화 시대의 금융시스템은 노후보장체계의 핵심인 소득안전망 구축과도 직결된다.

그렇다면 고령화 시대의 금융시스템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할까. 우선 고령사회와 산업사회의 금융시스템은 같을 수 없다는 데서 고민이 시작돼야 한다.

노동투입 감소, 저성장·저금리로 대표되는 고령사회와 노동이 주도하는 고성장 산업사회의 금융중개 시스템은 완전히 다르다.

근로소득이 주된 소득원천인 산업사회는 근로소득의 일부가 특별한 노력 없이도 고성장에 연동한 기대수익률과 고금리에 의한 복리효과를 통해 은퇴자산이 빠르게 증식하는 금융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은퇴자산 축적을 위한 금융의 특별한 역할이 덜 요구되는 경제시스템이다.

고령사회는 그렇지 않다. 생애주기 대비 근로소득 기간이 단축되면서 근로소득보다 금융소득이나 연금소득의 수준이 중요한 소득원천이 된다.

이 때문에 근로기간 동안 연금자산을 최대한 축적하기 위해 보다 많은 근로소득을 준강제로 저축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국민경제의 총투자 수준과 무관하게 노후목적의 금융자산과 연금자산 이탈 은행화와 함께 금융시장으로 급속하게 유입되는 것이 고령사회 금융중개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1994년을 전후해 금융저축 수단 중 연금보험 자산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으며 한국도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2000년 이후 연금보험 자산 증가가 가장 높은 성장을 보이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자금조달의 효율성’이 금융시스템의 효율성 잣대였다면 고령사회에서는 ‘연금자산 운용능력’이 금융시스템의 전체 효율성을 위한 중요한 잣대가 된다. 바로 이점이 두 사회의 금융 중개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이유다.

운용 성과에 따라 노후소득 대체율이 달라지고 현재소비와 미래소비 간 최적 배분이 달라지며 궁극적으로 실물경제의 성장에 다른 영향을 미친다. 금융시스템이 고령사회의 소득안전망인 동시에 부의 효과를 통해 소비와 성장 수준을 좌우하는 거시경제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수요자 중심 자산관리가 경쟁력 좌우

고령사회에서는 금융중개의 운용측면이 강조되면서 ‘자산운용’과 ‘자산관리’ 인프라가 금융시스템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금융시스템의 주요 개편 방향은 금리 플러스 알파를 생산하는 ‘자산운용산업’과 연금수급자의 자산배분과 투자결정을 지원하는 ‘자산관리플랫폼(자산관리산업)’을 기존의 금융시스템에서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고민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지금의 국내 금융시스템과 개별 금융업법은 공급자 중심으로 자금운용보다는 자금조달 위주의 금융제도다. 과거 압축성장 과정에서 부족한 금융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데 금융시스템의 우선 순위가 맞춰졌기 때문이다.

자본시장통합법마저 위험자본의 운용보다는 조달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정부주도의 위험자본 공급체계를 민간주도의 위험자본 공급체계로 전환하는 자본시장법의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더라도 자본시장통합법 이후에도 자산운용과 자산관리산업이 금융산업의 변방이 돼 있는 현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고령화 시대의 금융시스템은 조달보다는 가계와 연기금 자산 운용측면이 제도적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다. 또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금융 패러다임도 전환돼야 한다.

금융중개의 운용측면과 수요자 중심성이 조화가 되지 못할 경우 시스템 리스크와 불완전 판매 등 산업 활력을 약화시키는 스캔들이 표면화된다.

대표적으로 외환위기 이후 확산된 주택담보 소매금융, 펀드, 파생결합증권, 특정금전신탁 등은 상품 그 자체의 혁신성과 맞춤성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체계의 공급자 중심성으로 시스템 리스크와 금융소비자 신뢰형성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자산관리 중심의 소매금융 모델이 수요자 중심적인 서비스 체계와 조화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할 필요가 있다.

금융중개, 철저한 고객맞춤형으로 가야

금융정책 방향을 자산운용산업과 자산관리산업으로 나눠 살펴보면 우선 자산운용산업은 금리 플러스 알파를 통해 노후소득 대체율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자산운용 시장에서 ‘분산투자’라는 기본 투자원칙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저성장 경제에서 늘어나는 연금자산을 전통자산에 집중하거나 지나치게 홈바이어스된 자산배분에 머물지 않도록 해외투자정책이나 비전통자산에 대한 활력 제고를 위한 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모대체투자는 연기금 등이 주된 투자자이면서 LP 주도 시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규제가 아닌 시장규율이 작동할 수 있는 우호적인 여건이다. 또 수탁자 의무에 충실한 연기금이 최종 투자자로서 사모시장을 통해 혁신생태계가 필요로 하는 위험자본을 공급하는 조달체계는 기존의 브로커 딜러 중심의 위험자본 공급 경로와 비교할 때 제도적으로 안정성이 있다.

수탁자 의무에 제약된 연기금의 자산운용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브로커딜러에 의한 위험자본 공급방식에 비해 안정적이기 때문에 연금자산 축적과 함께 연기금 등 수탁자에 의해 형성되는 새로운 위험자본 공급체계에 주목해야 한다.

자산관리산업 선진화는 철저히 수요자 중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하며 이 과정에서 금융체제는 커다란 변화가 불가피하다.

자산관리서비스의 핵심은 연금 등 금융자산에 대한 ‘고객맞춤형’ 관리서비스가 돼야 한다.

고객맞춤형은 고객의 다양한 금융적 니즈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충족되고 필요에 따라 고객별 자산배분 및 권유서비스가 제공될 때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금융상품 ‘종합판매플랫폼’과 ‘독립투자자문업자(IFA)’의 도입이 뒤따른다.

소매금융상품에 관한 금융상품의 제조와 판매 분리는 뱅킹 3.0이라는 금융IT 환경과 함께 국내 금융체제에 상당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금융상품이 다양해지고 자본시장 균형발전이 강조될수록 금융투자 상품의 제판분리는 금융중개 효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종합판매플랫폼이 금융업 제판분리 정책의 완성 위에 가능한 것이라면 독립투자자문업자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이나 자본시장법상 자문업자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선함으로써 도입이 가능하다.

자본시장연구원 손흥선 연구원은 “독립적인 투자자문업자가 수요자 관점의 자산배분을 구현하는데 핵심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사적연금, 투자성 보험, 금융투자상품 등에 대한 투자권유가 가능하도록 제도가 발전할 필요가 있다”며 “단 도입 과정에서 보수 수취 문제 등은 경우에 따라 금융상품 가격체계에 중대한 변화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가능성을 높이는 방안 또한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자료제공: 자본시장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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