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문혜정 기자> 과거 우리나라의 금융시스템은 압축 성장에 필요한 금융자원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고령화에 따른 저성장·저금리 시대에는 기존 조달측면의 금융중개 역할이 크게 약화되고 대신 은퇴 후 적정한 소비를 위해 급속하게 늘어나는 연금자산의 운용능력을 제고할 수 있는 운용측면의 금융중개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 금융시스템은 기존의 ‘건전성’ 관점을 넘어 고령화·저성장과 같은 경제환경의 근본적인 변화 속에서 ‘효율성’ 관점의 재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본지는 고령화·저성장 시대 금융의 역할과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사례를 차례로 살펴보며 국내 금융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고령화, 반드시 물가하락 동반하진 않아
저출산과 평균 수명 연장으로 전세계적으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고령화와 물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은 상황이다.

고령화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정확한 방향성을 예측하기 힘든 점은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령화 진전 속도가 주요국 중 가장 빠른 반면 고령층의 상대 소득수준은 매우 낮아 물가와 같은 고령화의 사회적 파급 효과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인구 통계와 소비자 물가 변화를 비교해보면 고령화의 진행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른 선진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꾸준히 하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고령화로 인해 물가상승률이 0.2∼0.3% 하락했다. 선진국의 청년 및 중년인구(15∼49세) 비중과 CPI상승률 또한 고령화와 물가상승률 간 역의 상관관계가 나타났으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일수록 물가상승률이 낮은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고령화와 물가의 관계가 반드시 역의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Faik(2012)’에 따르면 고령화로 인한 수요둔화는 물가하락 요인이 될 수 있지만 노동공급 감소는 물가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고령화로 인한 노인부양 비율이 20%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고 20%를 넘게 되면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했다.

‘Konishi and Ueda(2013)’는 고령화가 평균수명 상승에 기인하는 경우 물가하락 압력을 줄 수 있지만 고령화가 출산율 하락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Bullard, Garriga, and Waller(2012)’는 주로 임금에 의존하는 젊은 층은 높은 임금과 낮은 실질금리를 선호하는 데 반해 근로소득보다 재산소득에 의존하는 노인층은 높은 실질금리와 낮은 물가상승률을 선호해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물가상승률이 좌우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렸다.

미국·유럽 ‘고임금’ VS 한국·일본 ‘저임금’
고령인구가 노동시장에 들어왔을 경우 국가별로 물가에 대한 파급력이 달라진다.

고령층 임금이 전 연령층의 평균에 비해 높은 미국 및 유로지역은 인구 고령화가 물가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평균수명 상승으로 고령층의 취업활동이 계속돼 정규직 또는 전일제 근로자를 중심으로 경제활동 참가가 확대된다면 인구 고령화가 임금상승 압력으로 작용해 물가상승을 유발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고령층 취업의 대부분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이뤄지는 한국과 일본은 물가상승 보다는 물가하락의 가능성이 높다.

고령화의 영향으로 고령층 및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확대되고 있는데 이들 계층의 경제활동 참여가 상대적으로 저임금 일자리에서 이뤄지면 평균임금이 낮아져 물가하락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령별 임금을 살펴보면 50세에 정점에 이르고 이후 감소하는 종 모양의 형태를 보이는데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고령층의 저임금 노동이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미국 및 유로지역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고령층 평균임금 수준이 다른 연령층보다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 국제경제부 국제종합팀 김정훈 과장은 “고령화가 더욱 진전될 경우 노동공급과 평균임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보면 노동공급 면에서는 고령화가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하지만 평균임금 면에서는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의료보험체계 미흡하면 물가상승 유발시켜
고령화 사회의 소비 측면에서 물가 영향력을 살펴보면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고령화가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화가 진행되면 보건의료비 증가, 교육비 감소 등 가계의 소비패턴이 변하게 된다. 이때 의료비와 같이 지출이 증가하게 되는 품목의 물가상승률이 다른 품목에 비해 높거나 교육비와 같이 지출이 감소하게 되는 품목의 물가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낮다면 전체 물가상승률은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가구주 연령대별 가계소비지출의 구성비를 보면 어느 나라든 보건의료비 지출 비중이 고령층에서 높은 반면 교육비 및 교통 통신 비중은 낮다.

미국과 같이 공공의료보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나라의 경우 고령화로 인한 의료서비스의 수요를 공급이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 노동통계국이 62세 이상 인구를 대상으로 1982년 12월에서 2011년 12월까지 소비자물가를 계산한 결과 같은 기간 중 의료비 상승률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넘어서면서 노인층 소비자물가 상승률(3.1%)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2.9%)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자산가격·소비여력 낮아져 물가 하락할 것
반면 일본, 독일, 한국 등은 보건의료비 상승률이 평균 물가상승률보다 낮아 오히려 물가하락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령층 가구주의 가구당 가처분소득도 일본, 미국, 독일 등 주요국 모두 전체 평균 70% 내외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특히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중장년층에 비해 30% 이상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구주 연령별 평균소비성향(소비지출 및 가처분소득)은 고령층 및 청년층 가구가 높고 중장년층 가구는 낮은 U자 형태를 보인다.

단 한국의 경우 고령층의 평균 소비성향이 다른 연령대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은 고령층의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을 보이고 고령층의 저임금 노동시장 참여, 사회보장제도 미흡 등으로 고령층 가처분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아 소비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한 한국 및 일본의 경우 이전소득보다 임금소득 비중이 여전히 높고 조세, 공적연금, 사회보험료 등 비소비지출 부담이 큰 것도 소비여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주택 등 자산가격 하락이 물가하락을 유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청년 및 중장년층은 자산을 축적하고 고령층은 축적된 자산을 매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령화로 신규 주택수요가 줄어들게 되면 자산가격이 하락하고 이는 소비 감소를 유발해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Takats(2010)’가 22개 선진국의 1970년부터 2009년까지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전체 인구의 1% 증가는 실질 주택가격을 약 1% 상승시키지만 노인부양비율이 1% 상승하면 실질 주택가격이 약 0.66%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 국제경제부 국제종합팀 김정훈 과장은 “정부지출 축소 및 직접세 인상 등에 의한 재정건전화는 수요 둔화를 통해 물가하락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지만 간접세 인상을 통한 재정건전화는 수요의 세율 탄력성에 따라 물가에 대한 압력이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우리나라는 고령층의 빈곤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고령화의 진전과 더불어 재정부담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재정여력도 크게 악화될 소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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