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2>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아침과 저녁에 주는 도토리의 총량은 변함이 없지만, 아침과 저녁의 숫자 차이에 화를 내거나 기뻐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소개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우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우화는 《열자》 〈황제〉편과 《장자》 〈제물론〉에 각각 소개되어 있다. 열자가 노자보다는 후대에 그리고 장자보다는 선대 인물로 분류하고 있으니 장자가 열자의 내용을 다시 소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열자》에 소개된 ‘조삼모사’와 《장자》에 소개된 내용은 관점이 다르다. 《열자》에선 원숭이를 사랑하는 송나라의 저공(狙公) 관점에서 그의 지혜를 말했다면 《장자》에선 원숭이의 어리석음이 부각되고 있다.

같은 우화를 소개하는데, 말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에 의해서 해석이 달라지도 하지만 독서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우화가 담고 있는 비유는 다르게 해석된다.

전통적으로 ‘조삼모사’는 명분과 실리 모두 변함이 없음에도 화를 내거나 기뻐했던 원숭이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백남준이나 강신주는 ‘소통’에 방점을 찍어 해석하고 있다.

원숭이를 사랑하는 저공은 수입이 줄어서 원숭이에게 줄 식량도 줄여야 했는데, 배고파서 잠을 못잘까 걱정이 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의 도토리를 주고자 했다. 그런데 원숭이들이 싫다고 하니 아침에 4개 주는 것으로 다시 제안한다. 즉 대화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타자와의 의견 교환과 설득은 충분한 소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교훈으로 풀이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또한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평가는 극과 극이다. 셰익스피어는 ‘살인적인 마키아벨리’라고 말했고 스피노자와 루소는 ‘공화주의의 대변자’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표현 ‘악의 교사’는 미국의 정치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붙인 별명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에서는 특히 그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고 폄하했지만 근대의 철학자들은 그의 책들이 풍자의 코드, 특히 유대교 신비주의(그노시스)적 코드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은유와 비유를 잘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지만, 권력을 지향하는 성직자는 물론 군주들이 찾아서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모두 한 권의 책 《군주론》에 대한 평가이다.

이처럼 ‘고전’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수록 그 책의 생명력은 길어진다.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그래서 해석이 다양한 책일수록 더 훌륭한 책이라고 말한다.

3000년 전에 쓰인 호메로스의 서사시부터 500년 전에 쓰인 단테의 서사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현재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재성의 출발점은 다양한 해석이며, 해석은 책에 담긴 풍자와 비유에서 비롯된다. 풍자와 비유, 상징에 담긴 저자의 메시지는 읽는 시대, 상황, 방법에 따라 다른 울림을 전달한다.

《열자》와 《장자》에 담긴 ‘조삼모사’의 메시지가 서로 다른 것은 읽는 사람이 어떤 교훈을 찾으려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이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로마사논고》도 읽는 이가 훌륭한 군주를 찾으려 하는지, 아니면 공화제의 모범을 찾으려 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게 된다.

그래서 알베르토 망구엘은 그의 책 《독서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루스와 나눈 대화편을 인용하면서 해석, 주석, 주해, 요지 설명, 연상, 반론, 그리고 상징적·우화적 의미 등은 텍스트 자체에서가 아니라 독서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텍스트는 화가가 그린 그림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 그림을 보면서 느낌과 의미를 찾는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림과 음악을 보거나 들으면서 그 의미와 느낌을 못 찾았다면, 즉 그림을 봐도 뭔지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그 음악의 뜻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그 그림을 읽을 문법이 없기 때문이며 음악을 이해할 독법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도 매한가지다.

성경에 “귀 있는 자는 들어라”(마태복음 13장)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의 귀는 지혜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고전이라 칭해지는 명작을 보고 구분해 내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는 부단히 공부하고 학습해야 쌓이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천성처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독서가에게 무궁무진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보고인 ‘고전’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는 과정만이 그 지혜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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