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만난 ‘혁신’ <1>

 
경계 사라진 사회, 예상치 않은 경쟁자 등장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통장을 개설하는 시대가 열렸다. 또한 지점 없이 인터넷으로만 거래하는 은행도 예비인가를 받은 상황이다. 금융사 100여년 만에 비대면 통장 개설은 물론 DNA가 완전히 다른 은행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통신 인프라와 소셜미디어라는 매우 충성심 높은 고객을 갖고 있는 네트워크 기업들이 은행업에 진출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기업들의 자기 변신이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발생하는 사회가 되었다.

‘통섭’이 강조되는 시대인 만큼 소비자 가전과 헬스케어가 결합돼 디지털 운동 측정기를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 정도의 변신은 가볍게 여겨질 정도로 예상 밖의 결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구글의 경우 검색엔진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포털 기업이었지만 향후 몇 년 안에 자동차 생산업체 내지는 인공지능과 로봇 생산업체가 될 것이다. 미국의 대형화학기업인 몬산토는 ‘종자’ 관련 산업과 ‘데이터 기반의 바이오 농업’과 생명공학에 뛰어들었고 대표적인 방산업체인 록히드마틴은 DNA분석기업인 일루미나와 손잡고 개인용 건강관리 솔루션을 개발한다고 한다.

제록스가 복사기 회사에서 의료·교통관련 IT회사로 바뀌었고 유명 화학기업인 듀폰도 식품·바이오·에너지 솔루션 기업으로 변신을 마무리했다. 후지필름도 필름산업의 거목 ‘코닥’의 몰락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화장품 및 제약업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하고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까지 생산하는 기업이 되었다.

한마디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열린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미 ‘무경계사회’로 진입했지만 우리나라는 법과 규제에 의해 그 속도가 늦춰져 체감이 더디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속도는 조만간 대세에 맞춰질 것이다. 역사에서 메가트렌드가 법과 규제의 벽에 막힌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IBM이 전 세계 최고경영자를 포함해 5247명의 임원(70여 개국)을 대상으로 경영과 변화 등에 대한 대면 인터뷰 결과를 발표한 자료 〈새로운 경쟁의 도래〉에 따르면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은 전 세계적 현상이며, 거의 모든 임원들은 ‘예상하지 못한 경쟁자의 출현’을 경영과 관련한 가장 위협적인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물류운송기업 슈나이더사의 CIO 쥬디 렘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을 내세운 경쟁자가 등장하여 시장을 장악하는 현상인 ‘우버 신드롬’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걱정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기찬 삼성카드 사장은 올 신년사에서 “현재 우리는 어떠한 기술과 산업이 융합될지 모르는 통섭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다른 업종과의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과 집단지성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경쟁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경쟁자를 뒤늦게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리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시도가 ‘산업간 융합’을 통해 진행되고 있고, 《혁신기업의 딜레마》의 저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말하는 ‘파괴적 혁신’의 빈도와 밀도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IBM은 이를 제때 예측할 수 있는 ‘인지컴퓨팅’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은 전통적인 방식인 사내 브레인스토밍과 예측분석 등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진입자나 시장의 변화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의 선도기업들은 인공지능 방식의 인지컴퓨팅으로 부족한 예측력을 커버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예비인가를 받은 인터넷은행의 주주로 참여해 통섭의 첫발을 안전하게 내딛었다.
핀테크에서의 ‘퍼스트무버’가 되어야 시장을 장악하고 경쟁자들과의 격차를 넓힐 수 있기 때문에 두 은행 모두 전력질주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움직이는 것과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범주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변화가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을 때는 브레인스토밍이나 예측분석 등의 전통적 방식으로 시장을 분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혁신’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보다 정확하게 예측하고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추는 것은 분명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 답이 인지컴퓨팅인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파괴적 혁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파괴적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크리스텐슨은 말한다. 금융업의 파괴적 혁신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금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빠르게 진화하고 변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향후 3년 금융회사들이 골몰해야할 영역이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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