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만난 ‘혁신’ <2>

 
‘깊은 곳’은 가식 없이 자기 자신 만나는 장소
신화 속 영웅들, ‘심연’ 경험한 뒤 진짜 영웅돼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웬만한 영웅들은 모두 지옥을 경험한다. 죽음을 관장하고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자 공간을 의미하는 ‘하데스’가 영웅에게는 통과의례와 같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웅은 왜 어둠의 공간인 ‘하데스’를 향하는가? 이유는 영웅이 공포심을 극복하고 고통에 대한 인내를 배워 진정한 영웅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재앙과 위해 요소에 흔들리지 않게 되며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을 받는 일이 없게 된다.

이렇게 지하계인 하데스를 다녀온 영웅은 오디세우스, 헤라클레스, 아이네이아스, 오르페우스 등이다.

이들은 하데스를 다녀온 뒤 각각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거나(아이네이아스)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았으며(오디세우스), 사랑하는 부인을 지하세계(오르페우스)에서 되찾는데 성공한다. 물론 고개를 돌려 돌이 되었지만 말이다. 즉 자신들에게 예정된 인생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하데스는 기록물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경》과 인류 최초의 서사시에는 ‘광야’ 내지 ‘깊은 곳(심연)’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다른 고전 작품에는 ‘먼 바다’나 ‘사막’ 등으로 등장한다.

이 장소는 모두 ‘나를 볼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며 ‘익숙한 공간에서 나와 전혀 다른 공간으로 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익숙한 공간은 ‘내’가 있는 공간이며, 전혀 다른 공간, 즉 어색한 공간은 ‘내’가 없고 ‘타자’가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자신을 객관화해서 성찰하도록 만들게 되는 장소가 된다.

#고전 속에 등장한 ‘심연’
기원전 19세기에 쓰였다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첫 대목은 “나라의 기초인 심연을 본 자”로 시작한다.
여기서 ‘심연’은 길가메쉬가 영생을 얻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위미한다. 그가 간난신고 끝에 얻게 된 불로초는 뱀이 먹고 말지만, 그는 필멸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을 완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의 9번째 행에는 “그는 먼 길을 다녀와 지쳤지만 평안을 얻었다”고 적혀 있다. 정신적 죽음을 경험하고 새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깊은 데’가 바로 심연이다. 삶의 깊은 곳으로 가라는 의미는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던 베드로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하는 성찰의 ‘열쇠말’이기도 하다.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쿠바의 어부 산티아고를 ‘심연’으로 보낸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는 주변의 비아냥거림을 떨치고 진정한 어부의 모습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먼 바다’를 향한다. 걸프 스트림. 그리고 85일째 되는 날 거대한 청새치를 낚는데 성공한다. 너무 커서 귀환 길에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그는 자존을 회복한다.

#금융업의 혁신은?
‘파괴적 혁신’의 주창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수년 전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장 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시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초저금리의 상황에서 극한의 경쟁을 펼치는 은행, 중계수수료까지 없애가며 경쟁해야 하는 증권사, 시장은 포화상태인데 인구마저 정체돼 성장 가능성이 암담하기만 한 보험사. 2015년 현재의 국내 금융시장의 단면이다. 사실상 모든 금융회사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과 네트워크 기반의 회사들이 금융업에 진출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금융사들은 새로운 전략으로 시장을 공략할 것이다.

크리스텐슨이 현재의 국내 금융사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수년 전 인터뷰에서 강조했던 ‘시장 밑바닥’을 다시 꺼내들 것이다. 영웅들이 제 모습을 찾기 위해 ‘하데스’를 찾았듯이 금융회사들은 ‘시장 밑바닥’을 다시 훑으면서 잃었던 활력을 되찾고 경쟁력을 회복하라고 말할 것이다.

은행 간 금리경쟁이 아니라 인터넷전업은행과 금리전쟁을 벌여야하는 은행은 ‘시장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인터넷전업은행처럼 영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핀테크’를 활용하든, 새로운 디지털 도구를 찾든 방법은 기술에서 나올 것이다. 증권사나 보험사들도 상황은 동일하다.

금융회사 스스로 낯설게 시장과 자기 회사를 보면서, 심연을 체험하는 가운데 새로운 성장의 방법론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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