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만나는 ‘기술’ <1>

 
인공지능, 불가능의 영역 ‘바둑’까지 넘봐
조만간 은행 핵심영역도 ‘소프트웨어’ 될 듯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넘보고 있다. 20년 전(1997년) 체스 세계챔피언을 물리쳤던 소프트웨어가 5년 전에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의 한 TV 퀴즈프로그램을 평정한데 이어 이번에는 프로바둑 기사를 무릎 꿇렸다.

네이처지가 지난달 보도한 바에 따르면 유럽바둑 챔피언을 세 차례나 차지한 바 있는 중국계 프로바둑 기사 판후이 2단은 구글이 인수한 인공지능 개발사 딥마인드의 ‘알파고’에게 5:0 완패했다고 한다.

체스의 다음 수가 20개 정도라면 바둑은 200개가 넘고, 대국의 수는 수학적으로 최소한 361!(팩토리얼, 361×360×359× …)에 달해 사실상 무한대여서 바둑은 그동안 소프트웨어가 극복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2016년 그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올 3월 세계챔피언인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까지 내밀어 소프트웨어의 세상 넘보기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세상 재구조화
자동방직기가 등장하면서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으로 만들어졌던 중세는 무너지고 자본에 의한 재구조화가 이뤄졌듯이 21세기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 삼형제가 세상을 새롭게 재구조화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이 주도하여 발전, 진화해 온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복병 ‘소프트웨어’를 만나 철저하게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해체는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된 건설을 의미한다.

‘구조화’의 본질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질서가 부여된 세계는 질서에 맞게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되며, 새롭게 형성된 질서는 모든 행위의 근거 내지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것은 자본이 가진 운동성을 근간으로 사회의 지배적 질서가 부여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인류는 자본에 의해 구조화된 세상에서 근 300년 정도를 살아왔다. 자본에 의한 구조화의 역사는 인류에게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제공하면서 진행되었다. 때로는 거품으로 형성된 활황을 누리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곧이어 경제적 고통을 맛보면서 포말처럼 부서지는 거품을 불황이라는 이름으로 겪어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지난 한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다.

이 같은 자본의 질서를 철옹성처럼 지켜주면서 세상을 함께 구조화시킨 것은 ‘기술’이다. 기술은 시대에 따라 동력을 변경시켜가며 진화해 왔고, 진화된 기술은 자본의 운동을 보다 강화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기술 진화의 결과 ‘소프트웨어’
그런데 자본의 충실한 파트너였던 ‘기술’이 성공적으로 버전을 업그레이드한 ‘소프트웨어’가 되면서 되레 자본을 지배할 만큼 성장한 것이다. 컴퓨터 혁명 65년, 마이크로프로세서 발명 45년, 그리고 인터넷 등장 25년 만에 소프트웨어가 주도권을 쥐고 자본에게 운동방식을 명령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압도적인 힘으로 세계를 주도하던 지난 100여년 동안 지구상에는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해왔다. 어떤 회사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고 또 어떤 회사는 블루오션을 찾아내 세계적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업도 현재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보여주고 있는 힘만큼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지는 못했다. 자동차를 대중화시킨 제너럴 모터스(GM)도, 전기를 발명하고 가전제품을 개발한 제너럴 일렉트릭(GE)도, 그리고 석유를 일상적인 에너지로 사용하게 한 거대 메이저 석유회사들도, 오늘날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처럼 인류의 일상을 일거수일투족 지배하지는 못했다.

의식주는 물론 인간의 이동 및 업무 처리 과정은 모두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마비될 만큼 현대적 삶은 기술의 총아인 소프트웨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은행도 소프트웨어가 지배한다
비단 소프트웨어 기업으로의 변신은 굴뚝 기업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글로벌은행 업계에서 혁신의 대명사처럼 받아들여지는 스페인 BBVA의 CEO 프란치스코 곤잘레스는 “은행은 소프트웨어 회사다”라고 말하고 ‘디지털화’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BBVA는 지난 5년간 5조원 가량의 전산 예산을 투입하고,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스타트업 인터넷전문은행인 ‘심플은행’을 1억1700만달러에 인수하는 등 기존 은행과 다른 행보를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의 배경은 곤잘레스 회장의 ‘디지털화’에 대한 신념도 있지만, 은행을 비롯한 금융업계가 처한 입장도 한몫하고 있다.

사실 국내 금융권도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금융문화로 인해, 심리적으로 소프트웨어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변화를 거부한 사람과 기업에게 미래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역사가 말하는 흐름을 거부하면서 성공을 거둔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변신을 위한 준비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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