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본다는 것’ <1>

 
눈은 보지만 뇌는 못 보는 인간 감각의 한계
아우렐리우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 조언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교육을 통해 감성보다 이성을 더 선호하게 된 우리는 계몽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해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먼저 선택하고 난 뒤 그 선택의 이유를 만든다고 한다.

미국의 신경생물학자인 로저 스페리는 이 같은 우리의 뇌에 대해 가설을 만들었다. “인간에게 독립된 자아란 없으며 우연한 일련의 선택을 마치 필연처럼 끼워 맞춘 것을 ‘자아’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이 전달하는 정보를 그대로 믿지 않고 해석을 한다고 뇌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는 눈으로 보는 정보와 뇌에 도달하는 정보의 양이 크게 다른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눈을 통해 보는 것의 10분의 1만 시신경에서 처리하고, 최종적으로 뇌에 전달되는 정보는 망막에 표시된 내용 중 30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뇌는 제공된 정보에 사전 지식을 더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가정하면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나 바뀌지 않는 내용은 정보에서 제거시키면서 정보를 처리해 경우에 따라 눈으로는 보지만 뇌는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를 ‘무주의 맹시’라고 말한다.

‘무주의 맹시’는 우리가 어떤 특정 대상에 집중할 때 발생한다고 한다. 하버드대 대니얼 사이먼스 교수 팀은 농구 경기장에서 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동영상을 제작해서 한 팀이 몇 번에 걸쳐 패스를 했는지를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이 영상에는 9초가량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동영상을 본 사람 중 절반은 고릴라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글라스 애덤스도 ‘무주의 맹시’ 사례를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서술하고 있다. 한창 크리켓 경기가 열리는 가운데 외계 우주선이 착륙을 했는데 아무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모두가 경기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휴대폰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걷고 있을 때나 중요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아는 사람을 스쳐 지나가곤 한다. 못 본 듯이 말이다.

이렇게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보지만 우리의 뇌는 그 중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못 본체 기억에서 빼버린다. 특히 직접 보고 듣는 감각기관의 활동에서 얻은 정보가 제한적으로 뇌에 전달되면서 뇌는 수많은 과거 경험과 미래 희망, 그리고 현재의 가설을 토대로 판단을 한다. 그러니 뇌에서의 판단이 꼭 합리적으로 이뤄진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그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는 항상 불안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꿈의 열쇠〉를 그리면서 이 난해한 그림에 대한 해설을 했는데, 버거는 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눈과 뇌의 불일치를 강조한다.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중세 사람들이 지옥의 실재를 믿고 있을 때에는 불의 광경이 갖는 의미는 지금과 훨씬 달랐을 것이다. (…) 우리들은 시선이 미치는 범주 내에서만 보게 된다. 그리고 보는 것은 선택이다. 이 선택 행위에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포함된다.”

보는 것도 선택이며, 그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것은 알고 있는 것과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마그리트의 설명은 요즘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우리의 뇌를 믿을 수 없었던 선각자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청한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사람이나 당신이 해를 끼쳐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말고 진리에 비추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명상록》에서 말하고 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두려움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율리시즈와 아이네이스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후손들에게 그들의 미덕을 모범으로 남기고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묘사하다보니 사실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를 따르던 산초에게 말했다.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당신이 바라는 대로 아니라, 10년 전에 그랬던 대로가 아니라, 성스러운 텍스트 속에 서술된 대로가 아니라, 실제 있는 그대로, 현재 국면의 모순적이고 울퉁불퉁한 땅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사물을 지금 있는 그대로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선입견과 아집으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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