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서 만나는 ‘안목’ <1>

 
시오노 나나미와 콜린 매컬로의 차이
역사와 사회를 읽어낼 안목에서 발생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로마사는 언제 읽어도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대제국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과정 속에서 읽는 재미가 쏠쏠한 인물이 여럿 등장하기도 하고, 공화정에서 제정에 이르기까지 정치제도를 바꿔가며 만들어내는 시사점 많은 사건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혹은 경영의 교범 역할을 해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급분화에 따른 사회적 모순과 환지중해 경제공동체 성격의 대제국을 운영하면서 만들어지는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차용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특히 우리가 로마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구간은 B.C 100년 안팎의 시기에서 AD 50년 정도 되는 기간으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절이다. 그리고 그 중심인물은 너무도 유명한 카이사르다.

20여 년 전, 이데올로기 대결의 종식을 예고하듯 동구권이 무너지던 시절, 자본의 힘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 당연히 시장이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등극하던 때, 일본의 여류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출판된다.

가진 것 없고 특별할 것도 없었던 로마인들이 체격조건이 더 좋은 주변 민족들을 물리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종국에는 지중해 전역과 중서부 유럽대륙을 평정하는 과정을 그는 15년에 걸친 대하시리즈로 엮어냈다. 그 시리즈의 1권은 당시 휘몰아치던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헤쳐 갈 등불이자 나침반처럼 여겨지며 장안의 지가를 높였다.

저자의 위안부 망언 등 각종 극우적 행위에 대한 보도가 가려질 만큼 그 책은 20세기 말 경영계의 핵심교범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마디로 ‘CEO를 위한 맞춤형 경영지식’이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에 앞서 로마사를 다룬 책이 20년이 지난 현재(정확히는 지난해 말) 국내에 소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가시나무새>로 유명한 콜린 매컬로가 쓴 <마스터 오브 로마>가 바로 그 책이다.

13년의 자료 준비기간, 그리고 7년간의 집필을 통해 7부작으로 소개된 이 책은 현재 국내에 1, 2부(로마의 일인자, 풀잎관)까지 소개되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로마인 이야기>와 <마스터 오브 로마>. 이 둘은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우선 여성 작가가 썼다는 점, 그리고 로마사를 전공하지 않은 저자의 책이라는 점은 두 책 모두 같다. 그런데 책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다르다. 시오노 나나미는 스스로 아마추어 사가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13년을 준비하는 데 쓴 콜린 매컬로는 스스로 전문가라고 말하지 않지만 로마사 전공자들이 그를 인정하면서 책의 진가가 높아졌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탈리아에서 자료 수집 및 고증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지만, 역사를 ‘보는 눈’에서 둘은 큰 차이를 보이면서, 그 결과의 차이까지 낳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영웅주의 사관에 갇힌 글쓰기를 했으며, 매컬로는 역사의 진화발전이라는 기준 속에서 지도자들의 역할을 고찰하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그 결과 <마스터 오브 로마>에선 시민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는 반면, <로마인 이야기>엔 영웅들의 이야기만 즐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매컬로는 제국주의로서의 로마, 그리고 그 산출물에 대한 기득권의 독점적 분배 과정, 국시와도 같았던 로마 시민에 대한 똘레랑스(관용)를 살리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한정시킨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분배의 문제가 전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시기다. 그리고 세계는 단순한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원한다.

브레히트는 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영웅에게 집중되는 의사결정 구조가 또 다른 사회악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웅이 아닌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어떨까?

브레히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갈릴레이의 도전은 기존 관행을 거부하며 객관적 사실을 증명하려던 갈릴레이의 ‘역사를 보는 눈’이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와 매컬로의 역사를 보는 눈은 전혀 다른 작품으로 귀착되었다.

각자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눈으로 책을 썼지만,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본질을 파악해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 읽어내서 책을 썼을 것이다.

바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미풍이 불어와도 그 바람의 느낌과 향후의 바람 강도 및 방향을 읽어낼 수 있는 눈. 그것이 바로 ‘안목’이다. 읽어내야 할 때 읽어내지 못하면 기회를 잃고 만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이 아니지만 우리는 반짝임에 현혹된다. 그리고 돌의 생김새만으로 추함을 말하거나 관심마저 가져주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들이다. ‘보는 눈’이 없는 인간의 의사결정은 역사를 담아내지 못한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