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임허용 없이 제도만 도입…포트폴리오 교체시마다 가입자 승인받아야

업계 “제반여건 마련 안돼 도입 불가” 수익률공시 등 업무·책임 부담 커  

<대한금융신문=김미리내 기자> 퇴직연금 활성화 차원에서 자산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도입한 ‘대표상품제도’가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도입 가능한 제반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시행할 엄두조차 내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상품제도는 퇴직연금 가입자의 운용 선택을 돕기 위해 사업자(은행, 증권, 보험사 등)가 자사의 대표적인 운용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이를 가입자에게 제시토록 한 제도다. 가입자의 관심부족과 계약형 구조, 원리금보장 중심 운용으로 수익률이 낮은 퇴직연금의 고질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가입자의 별도 운용지시 없이도 사업자가 짜놓은 포트폴리오대로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토록 하는 ‘디폴트옵션’ 도입을 위한 일종의 사전조치다.

대표상품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금융감독원에 사전 등록해 적격심사를 거쳐야 하지만 지난해 말 제도 도입 후 현재까지 금감원에 신청 신고를 낸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대표상품을 가입할 경우 사업자가 자동으로 이를 운용하고 자산 리밸런싱(포트폴리오 교체)을 해야 하는데 일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월 혹은 분기마다 리밸런싱 과정에서 일일이 고객들을 찾아가 동의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으로 모델포트폴리오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매월 혹은 분기단위로 이루어지는 리밸런싱 때마다 가입자들을 찾아가 동의서를 받는 것은 인력 면에서도 그렇고 수수료도 적어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라며 “퇴직연금 개선책 마련 당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일임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자의 운용방법을 다양화하고, 선택권 등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독려할 이유는 없다”며 “금융사들이 대표상품을 도입하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고 말했다.

일부 증권사의 경우 가입자가 투자상품을 결정해야하는 DC형과 IRP에 대해 랩어카운트 상품을 도입해 판매하고 있는 만큼 대표상품의 일임허용이 크게 문제될 것 없음에도 개선안 발표 시기가 촉박해지자 별다른 대안마련 없이 문제를 봉합해 버린 것이다. 도입 취지는 좋지만 빛 좋은 개살구라고 업계가 입을 모으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1차적인 부분이 걸리다 보니 (대표상품 도입에 대해) 회사 내부에서는 아예 고려사항도 되지 못했다”며 “대표상품 도입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상품 도입 자체는 의무가 아니지만 일단 도입을 할 경우 각종 의무사항이 따르게 된다는 점도 사업자들이 도입을 꺼리는 이유다.

금감원에 적격심사를 거치는 것 뿐 아니라 기존 퇴직연금 수익률 공시와 별도로 대표 포트폴리오에 대한 수익률 공시가 의무화 돼 있어 포트폴리올 관리·운용 업무 외에 각종 업무 및 인프라 부담이 늘고 수익률 공시로 인해 새로운 경쟁에 놓일 수 있어 쉽사리 발을 담그기 어렵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예·적금만 팔아놓으면 끝인데,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관리하는 전담부서, 시스템, 인프라가 필요하고 회사의 간판이 되는 상품인 만큼 운용 결과에 대한 책임부담도 크다”며 “의무화도 아닌데 비용과 시간을 들여 앞장서 할 곳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정착될 경우 운용경쟁을 통해 시장상황에 맞게 사업자들이 보다 탄력적으로 자산을 운용하게 되고 시장에 좋은 상품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돼 전반적인 수익률 개선과 자본시장 전체의 확대 및 선순환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주먹구구식 제도도입과 업계, 가입자들의 무관심으로 도입 1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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