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서 만나는 ‘고슴도치와 여우’ <2>

 
산업사회 이룩했던 구동원리 의미 상실
고슴도치의 ‘큰 것 한 가지’ 사라진 세상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은 고대인들에게 생태계의 포식자들로부터 항상 느껴야했던 불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불확실성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항상 확실성을 찾아 헤맨다.

그런 까닭에 확실성을 지상 최고의 것으로 여기게 된 인간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보험과 연금 제도를 고안했고, 노출된 위험을 줄이기 위해 헷지 등의 거래 습관을 만들어냈다. 물론 본원적인 심리적 안정을 위해 점집을 찾거나 신앙생활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처음 개념 규정한 사람은 시카고학파의 창시자였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불확실성과 위험은 계산 가능성에 따라 분류된다. 위험은 계산이 가능한 불확실성이고, 불확실성은 측정하기 어려운 위험이라는 것이다. 즉 둘 모두 불확실하지만 위험은 가격을 설정할 수 있되, 불확실성은 측정이 불가능하므로 가격을 부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림짐작 자체가 어렵고 짐작을 했다고 해도 틀리기 일쑤다. 그래서 위험은 시장경제가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윤활유라면 불확실성은 시장경제의 암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을 시장경제의 암적인 존재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불확실성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때문이다. 경제학자 토마스 셸링은 사람들이 계획을 세울 때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일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우발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게 되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결국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에 해당되는 일은 발생한다. 1929년 대공황이나 9.11테러 및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은 발생 자체가 이례적이지만,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일이다.

이 같은 일들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은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게 되는 것이다.

# 불확실성의 시대
그런 이유에서 인간은 불확실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이 말했던가. 불행히도 인간에게 주어진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 뿐이라고 한다.

20세기의 유명 경제학자인 존 K. 갈브레이드는 자신의 책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이후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사회경제 체제를 유지하던 지도적인 구동원리가 있었고, 그 원리에는 나름의 철학이 들어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구동원리에 들어 있는 철학을 판단의 기준으로 활용하면 불확실성은 대폭 줄어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과 ‘성선택’,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분업’,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과 ‘역사발전론’,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위버멘쉬’, 프로이트의 ‘무의식’, 칼 구스타프 융의 ‘집단 무의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20세기 초 사회를 지탱하던 구동원리가 붕괴되면서 산업사회 전반은 기준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결국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 그리고 남아 있던 귀족들까지 모두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게 된것이다.

물론 갈브레이드의 결론은 불확실성보다는 당시 고조되던 냉전의 틀 때문에 핵전쟁을 벌이면 지구가 자멸한다는 확실한 사실에 대해 미국과 소련(현재의 러시아) 모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냉전이 사라지고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갈브레이드의 지적만큼 오늘날 우리에게 ‘핵전쟁’의 공포가 절실하게 체감되지는 않지만, 그가 지적한 구동원리 속에 들어 있는 철학이 사라지면서 불확실성이 고조되었다는 통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제2차 기계혁명을 치루는 현재의 인류는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술과 과학의 진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진보의 속도만큼 불확실성의 규모와 범위도 확장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고민이다.

특히 앞서 말한 구동원리 속에 들어 있던 기준(자연선택, 사회진화론, 계급투쟁, 보이지 않는 손 등)들은 모두 고슴도치의 ‘큰 것 한 가지’에 해당되었는데, 이 기준들은 더 이상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큰 것 한 가지’가 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우’의 삶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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