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임유 편집위원> “지난해에도 체크카드 사용 비중이 증가했습니다. 합리적 소비가 정착되어가는 현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나라가 거덜날 뻔 했던 ‘신용카드 사태’가 마무리 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언론은 여전히 신용카드는 빚의 주범이고 체크카드는 합리의 상징이라 부른다.

‘갚을 능력이 없는 자’의 경우에 한정한다면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크카드는 합리적 소비의 전형이고 신용카드는 과소비와 무절제의 주범’이라는 식의 일반화가 정답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월은 슬로건을 진리로 만들어버렸다. 희생이 필요했던 시기에 잠시 만들어졌던, ‘신용이 빠진 신용카드’ 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형용모순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원죄(?)에 발목이 잡혀 인식의 왜곡을 바로 잡지 못한 신용카드 회사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지만, 분석과 비판을 게을리 한 언론과 전문가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무튼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진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슬로건을 진리의 자리에서 내리면 그뿐이다. 신용카드가 뒤집어쓰고 있는 누명만 벗겨주면 되는 일이다.

신용카드는 ‘신용’의 상징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이 종이로 만들어지든 가로 86, 세로 54(mm) 크기의 플라스틱 카드 형태를 띄든, 혹은 정보를 MS(Magnetic Stripe)에 저장하든 IC(Integrated circuit)에 모으든, 실물이 있든 디지털 형태로만 존재하든, 신용카드의 본질인 ‘신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떤 최첨단 ICT 기술의 은총을 입은들 신용이 빠진 신용카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직불카드나 체크카드 혹은 선불카드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신용카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신용(credit)’은 믿음 혹은 신뢰를 의미하는 라틴어 ‘cred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회생활에 있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바탕’이라는 주관적 개념으로 사용됐지만 점차 채권·채무관계에서 통용되는 경제용어로 그 성격이 변했다.

이제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고 팔 때 그 대가를 나중에 지급하는 행위인 바로 이 ‘신용’이 존재해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세상이 돼 버렸다.

신용(외상) 거래는 상인에게 유리한 거래 방식이다. 매출을 확대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상)매출 채권 회수에 대한 위험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그런데 복잡하고 대량 거래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경제체제는 상인들이 고객의 신용상태를 개별적으로 확인해서 신용거래 여부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딜레마라 하겠다. 누군가 이 수고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해지는 대목이다. 신용 거래는 소비자에게도 유리하다. 현금 소지의 불편을 더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비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대학 등록금 같이 한꺼번에 많은 돈이 드는 상품을 사려면 아주 오랫동안 돈을 모아야 하지만, 신용 거래라면 저축 목표액에 도달하지 않고도 소비가 가능해진다.

품질이 높은 제품이 세일을 하고 있을 경우 현금이 없어도 신용으로 그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상품을 구입하고 대금은 나중에 지급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자만큼의 수익도 얻게 된다. 그런데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 일일이 외상을 요구하고 받아낼 재간이 없다. 이 또한 딜레마다. 다수의 소비자를 대신해 신용의 위험을 대신할 사람(기업)이 필요해진다.

신용은 물건(혹은 서비스)을 파는 상인이나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른바 플러스 섬(Plus Sum)이다. 문제는 이 둘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매개하느냐 하는 것인데, 신용에 대한 상인과 소비자의 딜레마가 임계점에 다다라야 비로소 신용카드 회사가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상인에게는 무위험의 매출 증대를 보장하고 소비자에게는 무이자의 외상 구매를 약속해 주는 신용카드 회사 말이다. 이들은 개인의 재정상태 등을 파악해 신용거래 적격 여부를 결정하고 이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라는 징표를 부여한다. 얼마까지 외상으로 살 수 있는 지와 얼마의 이자율로 할부를 이용할 수 있는지도 결정한다. 이 모든 행위의 대가로 약간의 연회비를 요구할 뿐이다.

또한 이들은 ‘카드’를 받아줄 상인들과 가맹점 계약을 맺는다. 손님이 긁은 외상(신용) 대금을 며칠 만에 지급할 지와 고객에게는 어떤 혜택을 제공할 지 결정한다. 이에 따른 대가로 가맹점 수수료를 받을 뿐이다. 그러나 신용카드사와 소비자 그리고 신용카드사와 상인이라는 거래 관계와 주체가 확정됐다고 해서 신용거래가 바로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거래에 수반되는 비용과 수익을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상인은 자신이 얻는 이익과 부담해야 할 수수료를 비교하고, 개인은 소비를 통해 얻게 될 효용과 지불해야 할 연회비를 저울질한다.
이익과 효용이 높으면 거래가 성사될 것이고 그 반대면 거래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경제에 신용카드가 본격 도입된 지 반 세기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용 거래의 편익이 비용보다 높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의 비용 구조가 적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신용카드가 가져다 준 편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비용만 언급하는 작금의 세태가 걱정이고, 빚 권하는 사회의 주범 급으로 몰린 신용카드의 처지가 안쓰럽고, 체크카드가 예찬되는 세태가 한심할 뿐이다. 외상에는 과소비와 충동구매라는 부작용이 분명 따른다. 자신의 지불능력을 초과해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소득과 자산으로 갚을 수 있는데도 외상이라면 무조건 ‘소 잡는 일’로만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신용카드는 신용이 있는 사람에게 발급하는 것이고 체크카드는 신용이 없는(혹은 낮은) 저신용자에게 발급되는 것일 뿐 체크카드는 결코 신용카드의 대체제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고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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