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으로 만나는 ‘영웅’ <2>

   
 

현재 중시하면서도 최고 가치 유지한 영웅
탁월한 실력·용맹·태도로 오늘날에도 귀감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전쟁의 본질은 흑해 상권(무역로)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트로이전쟁을 고대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네’를 두고 벌인 미인쟁탈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게해에서 비옥한 흑해 연안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 있는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해협들의 물살이 너무 세서 당시 기술로서는 통과할 수 없어 육로로 짐을 운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트로이의 약탈이 끊이지 않자 기원전 12세기 초,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했다는 것이 <그리스인 이야기>를 쓴 앙드레 보나르의 설명이다.

이유야 어떻든 전쟁의 배경은 신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따라 극적인 내용으로 포장돼 있다.

<일리아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의 셋째 왕자 파리스가 납치를 한다.

왕비가 납치되자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은 그리스연합군을 결성한다. 이리하여 헬레네 왕비구출작전에 1186척의 배가 에게해에 뜨게 된다. 이를 빗대어 영국의 극작가 말로우는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에서 헬레네를 두고 “이 얼굴이 전함 1000척을 띄우고, 저 높은 트로이성을 불타게 한 얼굴이란 말인가?”라고 썼는데, 이후 헬레네는 미를 측정하는 단위가 되었다. 예컨대 1000척의 배를 띄우게 한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는 1헬레네가 되며, 1미리헬렌은 1척의 배를 띄울 만큼의 미인이 되는 식이다.

이러한 고사가 생긴 것은 아름다운 헬레네에게 당대 그리스의 모든 영웅과 장군들이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헬레네를 차지할 사람은 한 사람이므로 나머지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안전장치를 둔 것이 헬레네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청혼한 모든 영웅들이 참여한다는 서약이었다. 이 약속에 따라 헬레네가 납치되자 본토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무력(배와 군사)을 동원해 트로이 정복에 나선다.

하지만 어린 아킬레우스는 헬레네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당연히 구출작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지만 당대 최고의 전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장군들은 그의 참전을 간절히 원했다. 여기서 오딧세우스의 지혜로 아킬레우스가 참전을 결정하면서 <일리아스>라는 인류 최고의 서사시가 만들어지게 된다.

# 영웅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는 2개의 신탁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나는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명예를 얻으나 전쟁터에서 죽게 되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갓 태어난 아들을 거꾸로 스틱스 강물에 담궈 불사의 몸으로 만들었다. 아킬레우스는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여장을 하고 숨어 있었다. 하지만 오딧세우스의 꾀에 넘어가 신분이 드러났고, 결정의 순간 그는 죽음이 예고되어 있는 명예를 선택한다.

그의 영웅성의 시작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제력을 갖추지 않고 좌충우돌하는 그리스의 영웅들처럼 그도 똑같은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헤라클레스처럼 그 또한 다른 가치에 우선해서 명예로운 길을 선택한다.

비록 전리품 분배를 두고 아가멤논과 갈등하며 설익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당대의 전사 중에 그와 맞승부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의 전투 참여만으로 트로이의 장졸들은 성 밖을 나설 수 없을 만큼 힘과 민첩성, 그리고 용기를 갖춘 최고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아가멤논과의 갈등 이후 그는 분노에 휩싸인다. 이 순간 그에게 공동체는 없었다. 오딧세우스, 디오메데스 그리고 그의 스승 케이론 등이 그를 설득하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현재 ‘이 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속에 이는 현재의 감정과 움직임, 그것이 그의 삶 전체였다. 그런 상황에서 설득은 먹혀들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그것이 그를 또 다른 분노로 내몰았고 결국 전장에 나서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 그리스 영웅의 전형
아킬레우스는 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의 젊은이들, 특히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전쟁터에 나설 때도 <일리아스>는 꼭 챙겨가야 하는 책이었고 실제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해 준 <일리아스>를 틈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즉 고대 그리스 최고의 전사로서 그의 용기와 용맹, 특히 죽음을 초월하면서 명예를 좇는 모습은 귀감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의 영웅성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거칠지만 현재의 순간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를 보이는 3200년 전의 영웅과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비슷한 점은 ‘이 순간의 삶’을 중요 시하는 태도일 것이며 다른 점은 죽음을 초월하는 태도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영웅성은 지금도 유효할까? 호메로스가 그의 분노를 중심으로 서사시를 쓴 까닭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명예, 그리고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성숙하지 않는 아킬레우스로부터 우리는 부족한 점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의 거침없는 용맹과 명예로운 삶을 지향하는 태도는 어떤 이에겐 따르고 싶은 거울의 이미지일 것이다.

물론 ‘자신’만을 사랑하고 ‘현재’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이기주의’의 수렁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조직력을 해친다는 점에서 경영자들이 꺼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고가 되기 위해 그리고 선택의 순간 가시밭길을 택하는 태도는 여전히 <일리아스>을 읽게 하는 이유다. 현대에도 읽힐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영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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