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 은행의 첫 인터넷뱅킹 홈페이지 화면.

<대한금융신문=문혜정 기자> 띵동’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알림음이 울린다. 핸드폰 화면의 팝업창에는 이달 통장에 들어온 월급 액수가 고스란히 찍혀있다.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 상여금에 기분이 좋아진 A씨는 온라인쇼핑몰에 들어가 평소 아들이 사고 싶어 했던 게임기를 바로 결제한다.

최근 지인에게서 입수한 정보로 투자한 주식이 크게 오른것을 확인한 A씨는 미뤄뒀던 보험료 청구도 이 참에 해버리기 위해 보험사 사이트에 들어가 사진으로 찍어놨던 서류를 업로드 시키고 보험금을 신청했다. A씨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이 모든 거래를 하는데 걸린 시간은 20분, 불과 17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뱅크타운으로 시작된 인터넷뱅킹의 서막

1999년 7월 1일, 국내 최초 인터넷뱅킹서비스인 ‘뱅크타운’이 9시 뉴스에 등장하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국민, 신한, 농협, 외환, 기업은행을 포함해 지금은 사라진 제일, 조흥, 한일은행 등 9개 은행이 역사적인 가상은행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KT(옛 한국통신)에서 개발한 뱅크타운은 말 그대로 국내 은행의 인터넷뱅킹 서비스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통합뱅킹사이트로 각 은행의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은행의 홈페이지가 나오고 조회, 이체 등 금융서비스 이용이 가능했다.

뱅크타운으로 시작된 인터넷뱅킹은 국내 온라인 금융서비스에 엄청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모뎀 연결부터 각종 명령어를 입력해야 했던 기존 PC뱅킹과 달리 마우스 클릭만으로 실시간 금융거래가 가능한 인터넷뱅킹에 환호했다. 손가락 터치로 세상을 바꾼 스마트폰의 혁신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국내 최초 가상은행 프로젝트는 KT라는 거대 통신사의 자본력과 기술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함께 협력할 시중은행의 큰 결단이 필요했고, 그 시작은 국민은행이었다. 당시 국민은행은 개인금융을 위주로 하는 상업은행으로 기업금융을 발판으로 기세등등했던 조흥, 제일은행 등에 비해 힘이 약했다.

95년 KT는 온라인금융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국민은행과 손을 잡고 그해 연말 행장과 임원, 전자금융 부서장과 실무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국민은행 본점에서 인터넷뱅킹 시연회를 가졌다.

무거운 책임감 속 서비스 출시

2년 뒤인 97년 6월 KT와 국민은행의 합작품인 가상은행 프로젝트 개발이 완료됐다. 뱅크타운에 들어갈 협력은행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앞엔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게다가 대형은행들이 모두 참여하는 인터넷뱅킹서비스에 혹시라도 발생할 금융사고를 책임지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행이 금융회사가 아닌 금융기관으로 불렸던 90년대 금융환경도 녹록치 않았다. 기업을 지원하며 국가경제 발전이라는 공익성을 앞세웠던 은행들에게 정부가 민간을 대상으로 수익을 얻으려 하는 온라인금융서비스를 허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경부, 안기부 등 정부기관에서 손사레를 치며 또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결국 총대를 맨 사람은 99년 금융감독원 설립 당시 전산실 초대 기획과장이었던 김인석 과장(현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이었다.

그는 뱅크타운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았던 한국통신 김춘길 실장에게 “목숨 걸 자신이 있느냐”는 말을 던지고 인터넷뱅킹서비스 출시를 승인했다.

인터넷뱅킹은 IMF라는 국가 경제위기와 맞물려 국내 은행들의 명암을 갈라놓았다.

기업금융으로 거칠 것 없이 규모를 확장했던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은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지며 결국 인수 합병되고 말았지만 서민금융을 전문으로 한 국민·주택은행 등은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변화의 흐름 앞에 누군가는 무너졌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2년만에 경이적 기록 세우며 급성장

인터넷뱅킹 출시 후 1년 만에 국내 금융시장은 인터넷 금융전쟁을 방불케했다. 시중은행들은 온라인금융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최초’ 타이틀을 내세우며 차별화된 온라인 전용 상품 및 서비스 출시에 혈안이 됐다.

국민은행은 2000년 6월 국내 최초로 인터넷 전용 신탁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영업점 방문 없이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신규가입과 입금, 해지신청이 가능하고 펀드의 편입상품과 자산운용 내역까지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은행은 그해 7월 개인재무관리시스템(PFM)을 도입한 신개념 금융포털 사이트 ‘HanaIB.com’을 개설했다. 은행거래내역이 자동으로 입력되는 ‘인터넷 가계부‘를 비롯해 고객의 자산현황에 대한 평가와 증감내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마이 포트폴리오(My Portfolio)’, 고객이 인터넷뱅킹에 접속하자 마자 지금의 푸쉬(Push) 알림과 같은 교차판매나 금융거래 참고 메시지를 띄워주는 ‘원투원 메시지’도 최초로 선보였다.

한달 뒤에는 외환은행에서 국내 최초 인터넷TV뱅킹 서비스를 선보였다. 인터넷TV용 단말기인 셋톱박스를 가정의 TV에 연결해 리모콘으로 계좌조회와 이체, 해외송금, 신용카드 및 공과금 납부 등이 가능한 서비스로 국내 TV뱅킹 시대를 열었다.

인터넷뱅킹 가입자는 뱅크타운 출시 후 2년 만인 2001년 말 1131만명을 기록하며 1000만명을 넘어섰다. 인터넷뱅킹이 도입된지 만 10년 만인 2009년에는 국내 모바일뱅킹 가입자수도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인터넷뱅킹 가입자수는 이미 5900만명을 넘어선 상태였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장, 핀테크는 없다

인터넷뱅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년대 초반의 온라인금융서비스와 지금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핀테크 서비스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첨단 기술용어로 화려하게 포장했지만 본질은 PC를 그대로 모바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인터넷뱅킹 출시를 기점으로 만들어 놓은 전자금융감독규정과 보안방식은 2016년 현재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비대면과 모바일이라는 접근방식의 변화는 이제야 조금씩 규제가 풀리며 한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뱅크타운은 KT의 무모한 도전과 시중은행으로 살아남기 위한 국민은행의 몸부림, 새로운 금융시대를 열고자 한 금융감독원의 결단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도전 앞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융회사 CEO와 정부부처장들은 오늘도 핀테크 혁신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시장에서 핀테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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