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그리고 벤처금융<1>

<대한금융신문=임유 편집위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의 가을은 참으로 황량했다. 영원할 것 같이 기세등등하기만 하던 기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들 덕에 먹고 살던 금융도 몰락했다.

은행은 합쳐졌고 종금사와 리스회사가 사라졌다. 덩달아 ‘소공동 시대’도 저물었다. 그러나 폐허의 현장 속에서도 연꽃은 피어나는 법이다.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벤처(Venture)’라는 이름의 수많은 기업들이 ‘모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한낱(?) 중소기업이 법의 특별한 보호(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를 받게 되자 금융이 몰려들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와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술사)라는 긴 이름의 회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테헤란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벤처로 인증 받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중소기업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기업 벤처라는 말은 배부른 거지처럼 형용모순에 다름 아니다. 중소기업이 아닌 자, 벤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소기업이 벤처일 수는 없다. 사전이 말하듯, ‘신기술과 아이디어’가 없으면 벤처라는 이름의 고귀한 면류관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렇듯 벤처는 중소기업을 필요조건으로, 신기술을 충분조건으로 삼아 혁신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기업이다. 벤처라는 단어가 제도권(법률 영역)에 진입한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수많은 스타 벤처가 탄생하고 사라졌다. 밑 빠진 독마냥 돈만 먹는다며 계륵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벤처의 광풍이 불 시기에는 일부 몰지각한 창업자의 일탈이 알려지면서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기 집단쯤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좀체 오르지 않는 매출 탓에 속 빈 강정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과연 벤처에 미래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거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비마다 난관을 뚫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 매출액이 200조원에 이른다. 우리나라 GDP의 10%가 넘는 규모라니, 상전벽해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다.

그런데 세상은 또 다시 위기를 얘기한다. 20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파고가 밀어닥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성장은 멈추고 소비는 줄고 투자는 휘청거린다. 머지 않아 자산의 거품이 꺼지는 날, 대재앙이 닥칠 것이란다. 걱정이다. 해법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하기까지 하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 물음과 물음이 꼬리를 물 뿐 뾰족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저만치서 실낱 같은 희망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중소기업이다. 아니 벤처다. 아니 둘 다다.

이른바 ‘양극화’ 문제의 정점에 대기업 중심 경제가 자리하고 있는 한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그 자체로 당위성을 갖는다. 분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삶의 양식이 변해 더 이상 대기업적 대량생산 방식이 유용하지 않다는 주장도 중소기업 육성의 당위론에 힘을 더한다. 대기업 편중이 국민경제의 변동성을 높인다는 관점에서 중소기업 중심 경제로의 전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성장은 잠재성장률을 올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잠재력의 확충에는 투자만한 게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대기업 위주의 투자를 되풀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용 없는 성장’임이 드러났고 오히려 잠재력을 훼손하기까지 한다지 않은가. 중소기업, 그들에게 소명을 맡길 수밖에.

기업이 일자리를 늘린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기존 시장을 확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매출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노동을 비용으로 접근하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창업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마처럼 얽힌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곳은 그냥 중소기업이 아닌 ‘창업’ 중소기업 밖에 없지 싶다. 난 이 대목에서 벤처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기술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유일무이한 그 무엇이 아닐진대, 기업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른바 벤처(모험) 아닌가 말이다.

이제 답이 나왔다. 잠재성장률을 높여 난파 직전인 ‘한국경제호’를 구하기 위해서는 당장 중소기업 창업을 독려할 일이다. 창업이 신기술이고 또한 벤처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전히, 벤처가 답이고 창업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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