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병영소주 복원, 2014년 식품명인 지정

막걸리·약주·소주 생산하는 작지만 큰 술도가

   
▲ 술인생 60년을 보낸 끝에 병영성의 보리소주를 복원해 지난 2014년 식품명인으로 지정된 김견식 병영주조장 대표.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근대 유럽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소개될 수 있었던 계기는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하멜의 제주도 표류였다. 제주에서 강진으로 이송된 하멜은 조선에서 7년간 거주하게 되고 그 경험을 <하멜표류기>로 펴내면서 은둔의 나라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에서 육지로 옮겨오게 된 하멜은 강진에 머물게 된다. 강진에 병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병영은 병마절도사가 있던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한다. 강진의 병영은 조선조 500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 등 53주 6진을 총괄하던 곳으로,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육군의 군단 사령부라고 보면 될 것이다.

군대가 주둔하던 곳은 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리더십의 연장선에 술이 존재했고, 그 술은 병사들의 고된 훈련을 이겨낼 수 있는 휴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태종 17년 초대 절도사였던 마천목 장군이 성을 축조하면서 즐겨 마신 술이 강진 병영에도 전래되고 있다.

지난해 벨기에국제식품품평회(iTQi)에서 ‘2스타’를 받은 ‘병영보리소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병영소주’의 3대 전수자로 지난 2014년 식품명인 제61호로 지정된 김견식 씨(78, 병영주조장 대표)가 만들고 있는 술이기도 하다.

남도답사 1번지, 강진에서 술도가를 하고 있는 김 대표의 술 이력은 18살에 시작된다. 종갓집 형님이 운영하던 병영양조장에 입사한 해(1957년)의 그의 나이가 그러했다. 그 때만해도 면단위 양조장은 고양이 일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고 경기도 좋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막걸리는 매출이 급감하게 된다. 소비자들의 기호변화와 이농에 따른 막걸리 수요의 감소는 모든 양조장에게 타격을 입혔다. 강진 병영주조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91년, 종업원들의 월급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원주인은 매각을 결심한다. 김 대표 가족도 서울행을 결심했을 때이다. 더이상 술도가에서 비전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시절이라고 한다. 이 때 형님뻘 되는 전임 사장이 김 대표에게 인수의향을 타진했다고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 술 만드는 일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던 김 대표는 막걸리에 승부수를 걸기로 결심하게 된다. 좋은 재료로 좋은 막걸리를 만들면 큰돈은 못 벌더라도 먹고 살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막걸리 한가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는 약주(2000년), 증류주(2003년), 과실주 및 브랜디(2007년) 등의 제조면허를 연속적으로 취득한다.

막걸리 매출의 축소를 다른 주류의 매출로 상쇄하면 병영주조장만의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다변화된 상품이 막걸리와 약주, 그리고 증류소주, 일반증류주 등이다. 면단위 양조장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술을 내고 있는 것이다. 막걸리만하더라도 일반 막걸리외에 유기농 쌀만으로 빚은 설성막걸리, 2008년부터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 ‘한사발막걸리’, 그리고 살균주인 ‘복분자막걸리’ 등 4종류를 내고 있다.

   
▲ 지역의 좋은 재료로 술을 빚는 병영주조장의 발효조에서 익어가는 막걸리.

여러 주종을 내면서 김 대표는 기존 공장만으로는 설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2014년 길 건너에 2층 규모의 번듯한 2공장을 신설한다. 새로운 공장에선 막걸리를 주로 생산하고 1공장에서 약주(청세주)와 소주(병영보리소주), 일반증류주(병영사또주) 등을 생산하고 있다.

김 대표가 술 빚어온 지 올해로 60년, 그리고 자신의 책임 하에 술을 만들어온 지 근 30년이 되어간다. 아들 김영희씨와 함께 직접 설비를 고쳐가며 빚어내는 그의 술 철학의 근간은 ‘좋은 재료’이다. 지역의 좋은 쌀과 보리가 없다면 그의 술도 없다고 한다.

보리는 특히 쌀보다 술빚기가 어렵다고 한다. 쌀밥보다 잘 퍼지지 않고 잘 쉬기 때문이다. 또한 껍질이 두꺼워 도정이 힘들고 누룩균이 잘 파고들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전수된 보리소주 기법을 살려내지 못하면, 실물을 되살리고 있는 병영성은 복원되겠지만 그 성에 깃든 문화적 흔적은 사라진다는 생각이 힘든 술을 여전히 빚게 하는 이유이다. 보리소주는 그렇게 버텨낸 김 대표의 술인생 60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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