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줄자 강릉까지 차 몰고 마케팅 나선 박기자 대표

값비싼 국내산 옥수수와 직접 띄운 입국 쓰는 술도가

▲ 박기자 여량 양조장 대표는 직접 입국을 띄운다. 후끈할 정도로 뜨거운 국실에서 입국을 꺼내보이고 있는 박 대표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지난 2009년 막걸리 붐이 일기 전까지 막걸리는 한동안 뒷방 늙은이마냥 푸대접 받으며 기억에서 사라지던 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나라 주류시장을 이끌던 술은 분명 막걸리였다. 바쁜 일상이 기억을 망각의 강으로 밀어뜨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농촌 인구의 급격한 축소, 그리고 그에 비례해 진행된 도시화는 노동의 피로를 덜어주던 대표 술을 막걸리에서 소주와 맥주로 바꿔버렸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막걸리에 대해 잃어버린 기억은 ‘잘나가던 술’ 말고 또 하나 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즐겨 마셨던 막걸리는 요즘 우리가 마시는 막걸리와 다르다. 형태는 비록 같을지는 몰라도 70년대와 80년대의 공간에서 카바이드(탄화칼슘) 양철등불 놓인 포장마차, 혹은 허름한 대폿집에서 즐겨 마시던 막걸리는 요즘처럼 쌀로 빚지 않았다. 1964년 양곡관리법에 의해 쌀로 술을 빚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도성장기인 당시의 30년간 우리가 익숙하게 마셔온 술은 밀가루막걸리이다.

그런 까닭에 90년대 쌀막걸리가 시판되었을 때 웃지 못 할 풍경도 연출되곤 했다. 쌀막걸리가 밀막걸리에 비해 바디감이 경쾌하고 담백한 맛을 내자, 밀가루막걸리의 묵직한 맛을 기대했던 주당들에게 싱거워 맛없다는 평을 듣게 된 것이다. 

4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직접 입국을 만들며 40년의 기억을 오롯하게 담고 있는 밀가루와 지역 특산품인 옥수수로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을 찾았다. 깊은 봄 가뭄에 강의 밑천까지 드러낼 정도로 바짝 말라가는 강을 바라보며 찾은 곳은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에 있는 여량양조장.

3대째 사장 박기자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여량양조장은 밀가루막걸리의 원형을 유지한 몇 안 되는 술도가이자 여장부의 손길에서 만들어지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양조장이기도 하다. 또한 정선5일장을 찾는 관광객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 술도가의 대표 술인 옥수수 막걸리는 국내산 옥수수로 빚는 몇 안 되는 막걸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입산에 비해 가격도 비싸고, 재료 수급을 직접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도 변함없이 정선산 옥수수로 술을 빚는 박기자 대표의 고집스러움은 그녀의 누룩방에서도 느낄 수 있다.

대다수의 양조장들은 막걸리의 발효제인 누룩 내지 입국을 직접 만들기보다 전문업체의 제품을 공급받아 사용하는데, 이유는 만들기 까다롭고 관리하기 힘들어서다.

하지만 박 대표는 직접 40도에 가까운 온도를 유지하며 밀가루 입국을 만들어 자신의 술에 넣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강릉 출신인 박 대표는 농촌 인구가 줄면서 막걸리를 찾는 수요가 줄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냉장 배달차의 운전대를 잡기도 했다. 그것이 지난 2005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직접 강릉을 찾아 시민들에게 막걸리 시음을 시키면서 시장 개척에 나선 것이다.

▲ 여량양조장의 옥수수 막걸리는 국내산 옥수수를 사용하는 몇 안되는 양조장이다. 발효조 안에서 익어가고 있는 옥수수 막걸리

그렇게 다져진 12년의 시간 속에서 여량의 막걸리는 강릉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막걸리가 되었다. 이와 함께 5년 전부터는 지역 특산품인 황기와 더덕을 부재료로 이용해 술을 빚기 시작했다. 막걸리의 라인업을 늘린 만큼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박 대표는 내년 1월에 제대하는 아들을 손꼽아 기다린다. 4대째 이어가는 양조장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빚은 술이라면 결국 소비자들이 알고 찾는 술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4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100년 양조장의 꿈을 키우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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