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이숙여 여사의 토종 술 제조법을 이어받아 보리소주를 생산하고 있는 대마주조의 정덕진 대표가 양조장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가양주 전통의 우리 술은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면서 그 집안의 얼굴이 됐고, 마을이 쌓아가는 역사의 한축을 담당했다. 때로는 햇볕으로 송골송골 얼굴에 맺힌 땀방울 식혀주기도 했고 보름달에 잔별 몇 개 남지 않은 저녁, 하루의 수고를 털기 위해 술 한 잔을 찾았던 것이 우리네 문화였기 때문이다.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에도 지역과 함께 애환을 같이 나눈 술이 있다. 조기 파시를 따라 전국의 조깃배들이 모여들고,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전국에서 찾았던 굴비가 지천이었던 영광. 그래서 동네 개들도 500원짜리 지전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현금 유동성이 풍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거친 바닷바람과 싸우는 어부들과 굴비 유통으로 상업이 발전했던 지역이니 그에 걸맞은 술도 당연히 존재했다. 

게다가 호남지역의 세곡(稅穀)을 서울(개성과 한양)로 올려 보내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조창(漕倉),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수군 1700명이 주둔하던 지역이었으니 20세기 중반까지 누린 상업적인 성공의 토대는 충분했으며, 지역 술 문화가 흥성할 이유도 차고 넘쳤던 것이다.

영광을 대표하는 술의 이름은 토종술도 토종주도 아닌 ‘토종’이다. 우리 고유의 품종을 이야기할 때 쓰는 단어 ‘토종’이 영광 법성포에서 만들어지던 술이었다. 고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안동소주와 진도홍주처럼 전국구가 되지 못하고 이름마냥 술의 정체성도, 존재감도 드러내지 못했지만 토종은 일제 순사들의 눈과 해방 이후 밀주를 단속한 세무 공무원들의 눈을 피하면서 연연히 생산돼 왔던 영광 지역의 대표 술이었다. 

토종은 소주다. 쌀로 빚기도 했고, 밀가루와 보리로도 술을 만들었다. 이 곡식들을 발효시킨 술을 증류해서 얻어낸 토종은 뱃사람들의 손을 통해 바다로 나가게 된다. 거친 일을 마치고 마시는 술이기도 했고, 만선한 배에서 조기와 맞바꾸기 위한 화폐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뱃사람들의 손을 통해 진도를 비롯해 파시(조기 시장)로 연결된 서해의 포구로 입소문과 함께 퍼진 술이다. 

현재 영광에서 토종의 전통을 잇고 있는 양조장은 대마주조(대표 정덕진)다. 영광군의 9개 주조장을 통폐합해 군에서 유일한 양조장이기도 하고, 토종에 뿌리를 둔 ‘보리소주(톡한잔소주)’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술도가이기도 하다. 쌀보다 다양한 향미를 가진 보리로 내린 소주는 달큰하면서 구수한 맛을 가진다. 술의 질감은 농후하지만 보리소주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토종이라, 이 술을 통해 토종의 원형을 그려볼 수는 없다. 그러나 토종을 빚었던 정덕진 대표의 어머니(고 이숙여 여사)의 손으로 재현된 술인 만큼 토종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쁜 농사철, 하루 두 번은 내가야 하는 새참술을 준비하면서 술을 빚었던 이숙여 할머니의 술맛은 영광군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술 때문에 큰딸을 잃었던 이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 술 빚기를 중단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인 정 대표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산아들’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술을 빚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보리막걸리가 재현됐고, 이 술을 증류한 보리소주가 되살아난 것이다.

▲ 영광 대마면에 소재한 대마주조는 찰보리를 술의 소재로 보리막걸리와 보리소주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대마주조장의 찰보리체험관 전경.

그리고 술맛은 상으로 보상을 받았다. 농림식품부 주최 2014년 ‘대한민국 우리술품평회’에서 증류식소주부문에서 우수상을, 2013년과 2014년 연거푸 ‘남도 전통술 품평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영광 법성포 ‘토종’의 영광이 대마주조를 통해 재현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보리소주가 갖는 다양한 장점이 있음에도 우리 전통주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쌀과 보리, 밀가루 등 재료를 가리지 않고 빚었던 ‘토종’의 존재양식처럼, 대마주조는 술의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영광의 ‘토종’을 만들어내길 기원하는 바이다. 보리술이 갖는 장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욱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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