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맥주 ‘라거’ 스타일만 고수, 수입맥주로 구색 맞추기 급급 

크래프트 정신 충만한 젊은 양조자들이 스타일·맛 다양화 일궈내

▲ 거의 모든 맥주 재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가운데, 일부 맥주 양조장들이 홉과 몰트를 국산 재료로 대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제천에 위치한 뱅크크릭 양조장의 홉 농사 현장. <제공 : 뱅크크릭양조장>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는 냉혹한 평가를 받았던 우리나라 맥주가 맛의 백가쟁명 시대에 돌입했다.

2014년 주세법 개정 이후 세계 맥주에 심취해 있던 젊은 주당들이 직접 수제맥주 양조장을 만들면서 천편일률적인 맛을 내던 우리나라 맥주가 세계 수제맥주 업계 동향에 맞춰 다채로운 맛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라거’스타일의 맥주가 독식하던 국내 맥주시장의 구도도 서서히 변화해, 영·미식 페일에일과 IPA(인디아 페일에일)는 물론 독일식 필스너와 둔켈, 심지어 벨기에의 람빅과 플랜더스 에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맛의 맥주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동향은 두 가지 축에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수입맥주의 급증이고 둘째는 세계맥주의 흐름을 선제적으로 파악한 젊은 맥주 양조자들의 등장이다. 수입맥주의 역할은 ‘라거’이외에 다양한 맥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국내 맥주 소비자들에게 알려준 점과 와인과 비교해서 전혀 모자람이 없는 독특한 풍미를 가진 세계적 명성의 맥주를 국내에 소개한 점이다. 

그리고 젊은 양조자들은 홈브루잉(집맥주빚기) 내지 맥주 선진국에서 배운 양조기술을 기반으로 홉의 풍미와 몰트의 질감을 새로운 유형의 맥주에 담아내면서 젊은이들에게 맥주의 새로운 세계를 제시해주었다. 심지어 1980년대부터 크래프트맥주 혁명이 이뤄지고 있는 미국 시장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뉴잉글랜드 방식’의 수제맥주까지 국내에서 생산할 정도로 젊은 양조자들의 정보력과 기술력은 뛰어나기만 하다. 

하지만 젊은 양조자들이 생산한 맥주의 다양성으로 우리나라 맥주 시장 자체가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규모맥주제조 면허를 취득한 수제맥주 양조장이 100개를 넘어서고 있고, 현재도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 시장은 일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OB맥주를 소유하고 있는 주류 다국적 기업 AB인베브와 하이트진로가 바로 그들이다. 이 두 업체가 생산하는 맥주 시장의 규모는 대략 4조원. 전체 주류 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새로운 맥주에 도전하기보다 수익을 먼저 생각하며 맥주 수입 정도로 국내의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뿐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생산하는 맥주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 일고 있는 수제맥주 붐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제 겨우 200억 원을 넘어선 시장 규모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2014년 소규모맥주제조장 생산 맥주에 대한 외부 유통과 관련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본격화되고 있는 수제맥주 붐이 맛의 백가쟁명시대를 열고 있다. 사진은 뚝섬에 위치한 어메이징 브루어리의 탭룸.

하지만 대기업 중심의 주류 정책과 왜곡된 주세법 체계 하에서 거두고 있는 실적이라는 점에서 업력이 짧은 국내 수제맥주 업계의 분투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양한 맥주의 맛을 경험한 새로운 소비자들이 이 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맥주가 생산된 것은 1933년의 일이다. 일본의 기린맥주와 대일본맥주가 영등포에 공장을 건설하고 맥주 생산을 한 지 올해로 85년이 된 것이다. 맥주가 우리 술의 범주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술이 된 상황에서 전통 제조법에 얽매여 술의 출신성분을 가를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고창과 제주지역에선 국내산 보리로 몰트를 만들어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등장했고, 제천과 남양주 등에선 수년째 홉 재배에 나서 자신들의 맥주제조에 활용하고 있다. 즉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가지고 맥주를 만든다는 점에서 어느 시점에선 우리 술 범주의 변화도 예상할 수 있다.

쌀 소비 감소를 걱정하며, 쌀의 다양한 쓰임새를 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로 우리 술에 관심을 집중시키듯, 보다 많은 국내 농가가 맥주의 재료를 생산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보완이 오히려 절실한 시점이다. 질적으로 더 좋고, 맛의 다양성까지 갖춘 맥주가 보다 많은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수제맥주 양조장들도 보다 좋은 가격조건에서 대기업 맥주와 수입맥주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젊은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술인 만큼 우리 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전향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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