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상황에 맞춰 잠재력 펼친 무명 CEO가 기업 성장 이끌어 

영웅담론 얽매인 기업인, 실적·이미지에만 매몰될 가능성 높아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작가의 역사인식이 투영된 등장인물이 하나있다. 나폴레옹의 파죽지세에 유럽이 처참하게 무너지던 시기를 ‘퇴각하라’라는 명령으로 버텨낸 러시아의 총사령관 ‘쿠투조프’다. 

오스트리아와의 연합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물론 나폴레옹에게 밀려 모스크바까지 포기해야 했던 시점까지 그가 내린 명령은 ‘퇴각’이라는 단어였다. 이유는 러시아의 추운 겨울을 견뎌낼 군대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혁명 이후 유럽의 영웅으로 등장한 나폴레옹, 그리고 젊은 장교들에게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소극적인 명령을 내렸던 쿠투조프. 둘의 성격은 대조적이었지만, 결국 러시아의 쿠투조프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역사에선 나폴레옹을 주로 기억해낸다. 역사가들은 그의 영웅적 면모에 주목하고 그가 일궈낸 성과를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그렇지 못하다. 그나마 톨스토이가 근대가 만들어낸 영웅론을 배격하기 위해 쓴 소설 속에서나마 겨우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

종교의 권위가 몰락한 근대 이후 교양인들은 숭배의 대상을 잃고 잠시 주춤한다. 여기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영웅과 천재 담론이다. 종교에 부여돼 있던 카리스마가 희석되면서 발생한 권위의 공백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영웅에게 부여해 대리만족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기술이 시대의 중심 언어가 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히려 기술에 눌려 있다는 생각 때문에 카리스마를 가진 특별한 사람을 더 원하고 있다.

“영웅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깊이 도사린 이름 모를 불안감과 콤플렉스가 객관화되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영웅은 기획사에서 연예인을 만들 듯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키워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영웅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기업의 CEO도 영웅담론에 빠지려는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탁월한 경영성과를 토대로 기업에서의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오래도록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금융권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이사들은 연임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연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시킨다. 대표이사의 임기 동안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거의가 영업실적과 자신에 대한 이미지다.

하지만 “위대한 전략은 눈부신 공적이 없으며 위대한 승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은 그의 책 <전략>에서 말하고 있다. 동상이 세워지고 연말에 ‘올해의 최우수 경영자’로 선정돼 이를 기념하는 기업인들의 몇 년 후를 보면 답을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줄리앙의 지적이다.

오히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경영자들이 우수한 경영실적을 기록하는 경우가 더 많고 이름을 알리려 하지 않는 기업인들이 안정적으로 회사를 키워가는 경우를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치 저절로 이익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재력을 점진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회사를 매우 잘 운영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화려한 목적을 설정하지 않고 위대한 도전도 하지 않았다고 줄리앙은 설명한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많은 CEO들이 실제 기업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을 줄리앙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위해온 금융회사들도 같은 논리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해지려 하지 않는 CEO들의 행보에 주목하자. 오히려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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