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포길 낙동강·내성천·금천 만나는 나루터에 길손 맞는 주막

술과 음식 같이 내는 우리 술 문화, 하우스막걸리로 복원 기대

▲ 지난 2005년까지 오가는 길손에게 술과 안주를 내주었던 삼강주막.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돼 지방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하지만 박제가 된 문화재에서 지난 100년을 유지했던 주막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 공간이기도 했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길은 걷는 이의 마음의 가짓수만큼 나눠지고 모아지면서 땅 위에 거대한 거미줄 같은 흔적을 남긴다. 길손의 마음에 담긴 사연만큼 길의 가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기만하다. 그렇게 분기하던 길은 때론 막다름에 달하지만, 대개는 또 다른 사연을 담고 나눠지기 마련이다. 아침과 저녁, 두 나절의 하루 걸음이 모아지는 곳이 있다. 해거름이면 나그네의 배고픔과 피곤을 덜어주던 주막이 그곳이다.

한 때 한반도에는 12만개 쯤 되는 주막이 피곤한 나그네의 발길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주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술에 세금을 붙이기 시작한 1909년부터 술에 대한 통계를 정리한 책이 1935년에 나온 <조선주조사>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16년 주세법을 강화하기 이전까지 술을 빚는 이들이 신고만하면 주류제조허가를 내주었는데, 1916년 대략 12만개의 면허가 나갔다고 한다. 거의 주막이었고 일부만이 상업적 목적의 술도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가 일정한 규모 이상의 술도가에게만 허가를 내준 1916년부터 면허의 숫자가 급감하게 되는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7만개로 줄었고 1925년에는 3만개, 그리고 1930년에는 5000개 이하로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즉 줄어든 주류면허의 숫자만큼 나루터와 고갯길, 시골 장터 등을 지키고 있던 주막이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주막은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박물관에 박제화 돼 있는 문화재처럼 기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실체적 모습을 보지 못한 만큼 우리는 역사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되살린 주막으로 기억을 소환할 뿐이다. 

지난 주말 전국에 봄비가 내리던 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주막을 만나기 위해 경상북도 예천 땅을 찾았다. 내성천이 회룡포 마을을 용트림하듯 감싸면서 낙동강과 만나는 곳. 여기에 금천까지 세 개의 강이 만난다고 해서 삼강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 주막이 있다.

▲ 내성천이 회룡포마을 끼고 돌고 있어 귀한 경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 주는 안개가 짙게 깔려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다. 사진은 지난해 회룡포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이름 그대로 ‘삼강주막’이다. 유옥년 할머니가 2005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이곳은 주모가 살면서 오가는 길손에게 술 한 잔 건네주던 유일한 주막이었다. 이후 경상북도는 슬레이트 지붕을 초가지붕으로 바꾸고, 보부상들의 숙소와 사공의 숙식처 등을 복원하고 민속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방 두칸에 부엌 하나로 이뤄진 주막건물에 출입구는 일곱이다. 오가는 길손의 발걸음을 편하게 배려한 흔적이다. 없던 담장도 둘러쳐져 있다. 

주막 앞쪽으로 새로 지은 건물에서 주막 분위기를 내기 위해 회룡포길과 삼강주막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지역 막걸리와 배추전을 내고 있다. 하지만 주모가 떠난 주막은 문화재로 지정되는 순간 박제가 되어버렸다.

사람의 손때가 닿지 않는 순간, 이미 화석처럼 굳어가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당시와 같은 그림은 주막 뒤편에서 500년 동안 삼강을 지켜본 회화나무 두어 그루 뿐. 

주막은 술의 생산과 유통이 같은 공간에서 이뤄진 문화적 흔적이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술 생산을 전적으로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100년 전의 주막문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양주가 가능해지면서 막걸리와 청주, 약주 등에 대한 소규모주류제조 면허도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대도시 일부 지역에 하우스막걸리라는 이름도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가양주라는 우리 술 문화의 일부가 복원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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