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느껴지는 사과, 반성도 없이 재판결과로 면피하려해

금융회사 신뢰도, 실적이 말하지만 공공성 상실하면 퇴색돼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르네상스의 여명이 깃들던 15세기, 로마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되는 일은 유럽 최대의 전주를 고객으로 모시는 일이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무명의 서러움을 떨치고 유력 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부터다.

그런데 그 길이 멀고도 험했다. 은행업에 먼저 뛰어든 피렌체의 경쟁자들과 로마의 유력자들이 이미 은밀하게 교계의 주요 인물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틈을 파고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당시 금융업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메디치가는 실각한 교황 요한네스 23세에게 거액의 보석금을 융자해주기로 결정한다. 빈털터리에 권력까지 잃은 전 교황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것은 돈을 버리는 것과 같은 뜻이었지만 메디치가는 대출을 승인한다. 당연히 이 대출은 부실채권이 됐지만, 얼마 후 후임 교황으로부터 주거래은행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메디치 은행이 바라본 것은 눈앞의 손실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었다. 거액의 손실 뒤에 따른 귀한 명성, ‘믿고 거래할 수 있는 은행’이라는 브랜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해부터 국내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면서 적폐의 대상으로 줄곧 괴롭히고 있는 화두는 ‘채용비리’ 사건이다. 정치권 및 관료들의 입김과 고액예금자들의 청탁이 우선됐고, 성적을 조작해 유명대학 출신들을 채용했던 시절. 공정한 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를 관행처럼 받아들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국민들은 분노했고, 여전히 채용비리와 관련한 기사는 끊이지 않고 보도되고 있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을 필두로 재판을 받고 있는 금융권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새롭게 비리가 드러난 신한은행은 검찰에서 수사에 착수한다고 한다. 대구은행은 은행장 후보들이 채용비리 의혹을 받고 있어 자격논란이 일고 있다. 시민단체에선 시중은행의 채용비리 몸통은 금융지주사의 회장들이라며 검찰에 고발하고 나섰다. 정부는 권력형 적폐에서 생활형 적폐로 청산의 대상을 확대하고 나섰다. 채용비리와 관련, 금융권이 긴장의 고삐를 놓지 못하는 이유들이다. 

시중은행 중 가장 먼저 매를 맞은 우리은행은 10년 만에 필기시험을 부활시키는 한편 ‘7중 안정장치’를 만들어 공정한 채용시스템을 가동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채용비리와 비자금 문제로 수장이 구속된 DGB금융지주의 김태오 신임회장은 “바닥으로 떨어진 평판과 신뢰도 회복이 급선무”라며 원로 및 외부 인사 중심의 자문단을 구성해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말의 성찬이다. 검찰 수사 초창기이고, 바뀔 제도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므로 말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채용비리 사건이 어떠했는지 사실관계를 파악해 고백하거나 이를 사과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물론 일부 은행 및 지주사에서 사과문을 발표하긴 했지만 진정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반성 없는 사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500~600년 전 메디치 가문은 ‘기밀 유지’라는 최고의 덕목을 확보하면서 은행의 신용을 쌓았고, 귀족보다 시민의 편에 서면서 피렌체에서의 긍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등을 후원하면서 화려한 르네상스를 일으켰으며, 나중엔 모든 예술품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준다. 르네상스시기에 보여준 메디치의 미덕은 최고를 지향하면서 겸손했으며 낮은 곳에 시선을 둘 줄 알았다는 점이다. 

국내 은행들은 메디치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금융회사의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실적이다. 하지만 공적 이미지가 훼손되면 그 신뢰도도 추락하게 된다. 메디치가 공적 이미지 형성에 아낌없이 투자한 까닭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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