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감독원이 퇴직연금시장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혁신방안을 발표하며 국내 퇴직연금시장에 큰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도 그 움직임 중 하나로 현재 포괄적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위한 근퇴법 일부 개정안(고융노동부의 정부입법으로 발의)과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중소기업연합형 퇴직연금기금 설립법안 다수가 국회에 계류 중인 상황이다.

2005년 도입된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는 외형적으로는 170조원을 상회하는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입자 수 기준으로 전체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퇴직연금으로 전환됐지만, 대부분 300인 이상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져 사업장 기준 퇴직연금 도입률은 여전히 17%에 불과하다.

◆수익률 바닥치는 퇴직연금 ‘지배구조가 원인’

자본시장연구원은 십년이 넘는 운용 업력에도 불구하고 포트폴리오의 비효율성이 개선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현행 퇴직연금제도의 지배구조를 지적했다.

퇴직연금 지배구조는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계약형 퇴직연금제도는 사용자(기업)가 직접 퇴직연금사업자(금융회사)와 계약을 통해 제도운영과 적립금 운용을 모두 위탁하는 방식이며, 기금형 제도는 기업이 신탁관계인 별도의 수탁법인(기금)을 설립해 퇴직연금을 관리 및 운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배경으로 운용의 단순함과 비용절감을 이유로 계약형 지배구조를 채택했지만, 신탁제도가 발달한 미국, 호주 등 영미권 국가에서는 기금형 지배구조가 보다 일반적인 형태다.

계약형 지배구조는 퇴직연금제도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근로자(가입자)가 적립금 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다.

퇴직연금제도를 처음 도입하는 단계에서 노사 합의를 통한 사업자 선정이 의무화됐지만 아직까지 형식적인 절차에 머무르고 있고, 최초 사업자 선정 이후 근로자가 우수한 금융기관을 탐색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또 근로자가 실질적인 운용 과정에서 배제됨으로써 퇴직연금 적립금의 전반적인 운용방향이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 강화라는 연금제도 본연의 가치 실현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퇴직연금사업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 대부분은 연금 부채가 갖는 장기적 재무위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현행규제에서는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의 통합을 허용하고 있어 앞으로 민간금융회사인 퇴직연금사업자의 시장 포획 문제는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다양한 기금형 법안 발의되며 제도개선 논의

계약형 퇴직연금제도와 비교해 기금형 지배구조의 가장 큰 장점은 근로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사결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훨씬 수월하다는 점이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동수로 참여하고 외부 전문가가 포함되는 위원회 조직을 통한 의사결정체계는 퇴직연금사업자의 포획이라는 현행 계약형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완화하는 제도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제도 주체 간 이해관계 측면에서도 기금형 지배구조는 노·사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수탁법인이 지속적으로 해당 연금을 관리함에 따라 노·사 중심의 연금관리 및 운용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

적립금 운용 효율화 측면에서도 기금형 지배구조의 장점이 보다 부각될 수 있다.

자산운용의 전문성이 부족한 근로자나 기업 담당자로 인한 왜곡된 형태의 운용 구조가 고착화돼 있는 상황에서, 기금형 지배구조는 의무적으로 수탁법인의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참여하기 때문에 퇴직연금관리 및 운용의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다.

또 협회 및 공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들의 연합형 기금 설립도 허용돼 자유로운 가입을 전제로 규모의 경제를 통한 효율적인 퇴직연금 운용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기금형 지배구조를 도입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포괄적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안’과 ‘중소기업연합형 퇴직연금기금 설립안’ 두 종류의 법안을 검토 중이다.

두 법안 모두 퇴직연금제도에 기금형 지배구조를 도입한다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포괄적 기금형 의 경우 적립금 운용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 강한 반면, 중소기업연합형은 퇴직연금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다수의 영세 사업장에 대한 연금사각지대 해소 문제를 더 강조하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의 핵심인 수탁법인의 경우 민법 및 근퇴법상 절차에 따라 비영리 재단법인의 형태로 설립되는데, 법인 설립에 앞서 수탁법인의 정관 및 기금형퇴직연금규약을 작성해 고용노동부장관의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하며 현재와 같은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에 계류 중인 두 법안은 설립 가능한 기금의 형태로 단일형과 연합형을 제시하고 있다.

단일형은 스스로 규모의 경제를 이뤄 하나의 기금을 조성할 수 있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국내 500인 이상 사업장은 모두 퇴직연금으로 전환된 상태이며 퇴직연금 관리를 위한 인력 및 시스템이 구축돼 있기 때문에 공공적 성격이 강한 공기업을 중심으로 기금형 지배구조가 확산될 전망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에서 보다 의미있는 부분은 연합형 기금 설립이다. 연합형 기금은 단독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는 중소기업이 모여 하나의 기금을 결성하는 방식이다.

연합 방식은 지역별, 산업별, 관계사별 등 다양한 형태의 합종연횡이 가능한데, 운용의 효율성 제고나 기금 운용의 비용절감 측면에서 중소기업에 제공하는 편익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퇴직연금제도로 전환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중소기업 사정을 감안할 때 자발적인 연합형 기금 결성을 기대하긴 어려운 측면도 있다.

따라서 연합형 기금의 실질적인 제도 확산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정부 지원뿐만 아니라 세금 및 비용 감면 같은 간접적인 재정 지원도 함께 수반될 필요가 있다.

◆자산운용기관의 역량에 도입 성공 달려

새로운 지배구조 도입은 기존에 공고히 형성되어 있는 퇴직연금 시장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감한 부분은 포괄적 기금형 퇴직연금에서 허용하고 있는 수탁법인의 성격 및 설립 주체다.

개정안에서는 수탁법인의 성격을 비영리재단법인으로 한정하고 설립 가능한 기금 유형으로 단일형과 연합형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금융기관인 기존 퇴직연금사업자가 수탁법인 설립의 주체가 되는 소매형 기금 설립 금지를 의미한다.

자본시장연구원 남재우 연구위원은 “기금형 퇴직연금제도의 도입 목적이 가입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민간금융기관이 주도하는 소매형 기금 허용도 조속히 추진될 필요가 있다”며 “우려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마련된다면 민간이 주도하는 소매형 기금의 역할 및 효용성은 결코 작지 않고 기금 간 경쟁 구도도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 후 운용 효율성 강화를 통한 퇴직연금의 장기 수익률 개선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1년 미만 단기 예금을 매년 갱신하는 방식으로는 노후소득보장 강화라는 퇴직연금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 기금형 지배구조를 도입하고 전문가가 포함된 기금운용위원회 활성화를 통해 위험자산 비중을 일정 부분 확대하고 적절히 분산된 글로벌 포트폴리오를 구축한다면 장기수익률 측면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 기금형 지배구조가 발달한 호주나 미국 등의 운용사례 및 성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현행 계약형 퇴직연금에서도 명문화된 투자지침서 (IPS)를 작성하고 별도의 자산운용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기업이 보다 높은 운용수익률을 시현하고 있다.

남 연구위원은 “기금형 지배구조 도입이 퇴직연금 적립금의 장기수익률 제고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포트폴리오의 기초 상품을 제공하는 자산운용기관의 선제적 역량 강화가 필수”라며 “운용의 전문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비영리 수탁법인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자산운용 전반을 포괄적으로 위탁하는 OCIO(Outsourced CIO) 체계와 같은 통합자산관리 역량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어 “퇴직연금 상품 단위에서는 TDF(Target Date Fund)와 같은 생애주기형 펀드에 대한 개발 및 운용 역량의 축적도 매우 중요하다”며 “기금형 지배구조와 함께 확정기여형 가입자에 대한 디폴트옵션 제도가 활성화되면 수익률 제고 측면에서 긍정적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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