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식소주와 가격 경쟁할 수 있는 2000원짜리 증류소주 설계 중

생맥주 이어 증류소주도 크래프트 영역 블루오션, 가능성 높게 봐

▲ 110년만의 폭염은 여러 상처를 남겼다. 과수농가들이 울상이 이유도 그것이다. 올 사과 수확량을 예년의 30% 정도로 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부사장은 그런 가운데서도 국산 와인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펼치고 있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한국에서 와이너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매우’라는 부사가 붙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우선 날씨가 포도 생산에 적합하지 않다. 와인 생산의 최적지는 포도의 생육기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온대 기후 지역의 과일은 열대 과일보다 당도가 높지 않다. 이 말은 온대 과일로는 충분한 알코올 도수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지역에선 과일을 이용한 발효주보다는 쌀과 기장, 보리를 발효시킨 술을 주로 생산해 온 것이다.  

둘째 요인은 와인에 관해 흔히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궁금증과 연결돼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 신대륙의 좋은 와인들이 값싸게 수입되는 상황에서 왜 우리 와인을 생산하려는 것인지,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자주 만나곤 한다. 가성비를 갖춘 와인은 물론 만원이면 4캔을 살 수 있는 맛있는 맥주까지 술은 차고 넘칠 정도로 다양해지고 있는데 굳이 전통적인 생산국이 아닌 나라에서 와인을 왜 만드느냐에 대한 의구심인 것이다. 

그런데도 국내에는 100여개가 넘는 와이너리들이 있다. 그나마 강수량이 적고 일조량이 많은 경북 영천과 충북 영동에 밀집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와인을 만드는 곳도 많아지고 있다. 왜일까.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와 온대성 과일을 이용한 술을 빚은 까닭은 무엇일까.

답은 술이 로컬푸드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농산물로 만들고 불필요한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으면서 안심할 수 있는 먹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 술을 만들 때와 똑같은 이유에서 우리의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 농산물로 좋은 와인을 만들고 싶어 하는, 하지만 아직 본격 포도주 양조에 앞서 사과로 승부를 걸고 있는 예산의 은성농원과 예산사과와인에서 양조를 책임지고 있는 정제민 부사장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 예산사과와인은 추사라는 브랜디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이 와이너리 지하의 숙성창고. 정제민 부사장은 칼바도스같은 브랜디를 오크통에서 숙성시키고 있다. 이밖에도 지역쌀을 이용한 저렴한 쌀소주까지 생산할 계획이다.

“사실 와이너리 운영은 밑 빠진 독에 술 붓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당에선 과실주가 사라졌고 과일 발효주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구매자가 마시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선물용으로 구입합니다.”

정제민 부사장이 바라보는 국내 와인시장에 대한 한줄 평이다. 그의 말처럼 국산와인에 대한 홀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탕을 넣어 보당하지 않으면 와인이 안 만들어진다는 둥 일반인들의 시선은 차갑기만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새로운 사과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오고 있다. 스틸과 스파클링 와인은 물론 단맛을 줄인 드라이 버전을 생산하는데다 타닌의 질감이 높고 신맛까지 갖춘 로제와인도 생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 부사장이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시장은 쌀소주 시장이다. 쌀소비가 계속 줄고 있는 가운데 최근 증류소주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조만간 지역의 쌀소주 시장이 열릴 것으로 생각하고 희석식 소주와의 가격 경쟁력에서도 밀리지 않는 증류소주 양조법을 실험하고 있다.

현재 예산의 예당평야에서 생산되는 쌀과 발효제를 이용해 20일 정도 발효시켜 알코올 도수 17% 이상의 원주를 만들고 이를 알코올 도수 21%의 술로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희석식 소주와의 경쟁을 고려해 350밀리리터 한병에 2000원 정도에 소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상품을 설계 중이다.  

현재 이 프로젝트는 농업진흥청과 같이 진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지는 레시피는 지역의 쌀로 쌀소주를 만들고자 하는 지역과 공유하게 된다. 즉 각 지역의 쌀과 서로 다른 물을 사용한, 그래서 방식은 같지만 맛은 다른 여러 소주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제민 부사장은 쌀소주와 사과 브랜디(추사) 등을 위해 증류소를 아예 새롭게 만들 계획이다. “수제생맥주처럼 증류주 영역도 크래프트가 뜰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증류주 창업은 충분히 고려할만한 시장입니다.” 증류주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정 부사장의 코멘트다. 정 부사장의 이야기처럼 전국에 더 많은 증류소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스키 성지기행을 책으로 엮었듯 우리 소주를 두고 성지기행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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