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 이전에는 씹어서 타액 속 효소로 발효시켜 술 만들어

생산량 늘자 지배자의 정치도구였던 술, 민간에 급속 확산

▲ 부산 금정산성막걸리에서 빚고 있는 누룩. 고온다습한 기술대로 갈수록 누룩의 두께는 얇아지고 피자 도우처럼 표면적은 넓어진다. 이러한 형태의 누룩은 금정산성과 울산의 복순도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술은 자연 앞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인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던 신비한 음료였다. 위험이 사방에 산재해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맹수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고 식량과 좋은 주거지역을 두고 경쟁 공동체와 전쟁을 벌여야 할 때 술은 신묘한 힘을 가져다줬다. 그렇게 술은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면서 수천 년 동안 인류와 함께 동고동락해온 대표적인 음료다. 그래서 긴 역사 속에서 공동체가 부침을 거듭할수록 술은 다채로워졌으며 술을 즐기는 문화도 다양해졌다.

특히 술 문화가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은 농경과 정착을 선택하면서 사회가 복잡해지면서부터다. 이 시절 지배자는 제사장과 통치자를 겸했다. 농경과 수렵의 결실은 수확물을 가져다준 대상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고, 술은 제례의 기본 음료로 자리하게 된다. 제사장은 그 술을 통해 신과 접하게 되고, 그 능력을 공동체 구성원에게 노출시켜 자신의 권위를 유지시켰다. 그래서 술은 제사장이 효과적으로 공동체를 통치하는데 필요했던 핵심 통치수단이 되기도 했다.

피지배자에게 시혜라는 차원에서 제공된 술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내려와 임금이 주요공신들에게 하사하는 선물꾸러미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처럼 수직적 관계에서 유지되던 술이 지배세력의 손에서 벗어나 일반에게 널리 확산된 시기는 곡물을 효과적으로 발효시킬 수 있는 누룩이 만들어진 뒤의 일이다. 과일과 꿀을 발효시킨 술들은 과일과 꿀 자체에 발효제인 효모가 존재하기 때문에 효모와 과육 혹은 꿀(꿀과 물의 혼합액)을 잘 섞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꿀술(미드)과 포도주를 들곤 한다. 그러나 곡물을 발효시키기 위해선 주성분인 탄수화물을 분해시켜 당으로 전환돼야 비로소 술로써의 진화가 가능해진다. 

동아시아지역은 곡물을 발효시킨 술이 발전한 곳이다. 따라서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와 당을 알코올로 변환하는 효모가 같이 들어 있는 누룩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사람의 타액에 들어있는 효소(프티알린)를 이용해 녹말을 당으로 분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직도 일본과 대만의 외딴 지역에서 결혼식에 사용하는 발효주를 여자들이 쌀이나 식혜를 씹어 그릇에 모아 술을 빚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흔히 ‘미인주’라고 말하는 술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술들이다. 

▲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예술주조의 누룩실 내부 풍경. 남쪽에 비해 온도 및 습도가 낮은 지역에선 누룩의 두께가 두꺼워진다. 이런 누룩의 형태는 추운 북쪽, 특히 중국 내륙으로 가면 벽돌보다 큰 크기의 누룩으로 만들어진다. 이를 대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다 밀과 보리 등 겉껍질에 효모가 있는 곡물을 이용해 누룩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술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술은 점차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음용할 수 있는 음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누룩은 온도 및 습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3국의 누룩의 형태가 모두 다르다. 중국에서 넘어와 우리를 거쳐 일본에도 전달됐지만 3개국의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누룩도 다르게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와 중국은 병국, 즉 떡처럼 누룩을 성형해서 사용하는데, 일본은 쌀 자체로 누룩균을 입힌 입국을 사용하고 있다. 날씨가 춥고 건조한 지역은 떡누룩을 사용할 수 있지만 습도가 높은 지역에선 누룩을 떡처럼 두껍게 빚으면 썩기 때문에 입국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모양의 차이는 우리나라 내에서도 발생한다. 모든 지역의 누룩이 병국 형태이지만 추운 북쪽의 누룩은 두툼한 반면 따뜻한 남쪽의 누룩은 얇은 피자 도우처럼 생겼다. 습도를 고려해서 필요한 효모를 생성시키기 위한 지혜가 담긴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과 함께한 누룩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흑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일제가 우리의 가양주 전통을 없애려고 시행한 주세령이 반포되면서 집집마다 빚었던 누룩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또한 일본의 입국 방식으로 술을 빚는 것이 유행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누룩들도 사라지게 된다. 해방이 됐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식량이 부족한 국가에서 쌀로 술을 빚을 수 없었고, 기왕에 들어와 있던 입국발효법을 양조장에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밀주단속을 피해가며 누룩을 빚어왔던 부산금정산성 누룩과 공장에서 누룩을 생산하고 있는 송학곡자와 진주곡자의 고군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2000년대 이후에 새로 생긴 술도가들에서 전통누룩을 직접 만들어 술을 빚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평택의 호랑이배꼽막걸리, 포천의 술빚는 전가네, 청주의 풍정사계, 홍성의 예술, 장성의 청산녹수, 울진의 복순도가 등이 자신의 술맛을 유지하기 위해 고유한 누룩제조법을 유지하는 곳들이다. 이와 함께 누룩이 가진 장점을 취하기 위해 더 많은 양조가들이 누룩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누룩전성시대는 아니어도 더 많은 우리 술이 전통의 기법으로 빚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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