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세계 퇴직연금사업자 및 감독당국이 호주의 퇴직연금제도에 주목하고 있다. 호주는 각종 국제비교 순위에서 연금제도 수준이 덴마크, 네덜란드에 이어 최상위권에 속해 있는 나라로 시의적절한 정책 구현을 통해 우수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보험연구원에서 호주의 퇴직연금제도를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퇴직연금의 지속성을 위해 사용자 부담금을 3%에서 12%로 인상했으며 법정 최저연령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중도인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2017년 기준 호주의 퇴직연금적립금 규모는 GDP의 127%에 달하며 가입률도 94%를 넘어섰다.

◆수익률 폭락 후 디폴트 투자상품 집중육성

호주의 일반적인 노후소득보장제도는 기초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2층에 속하는 퇴직연금제도(확정기여형 중심)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7년 6월 기준 호주의 퇴직연금규모는 적립금 2조5000억호주달러, 계좌수 2800여만개(전체 인구 2500만명)에 육박한다.

호주의 퇴직연금제도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관여하고 있는데 크게 △퇴직연금기금(이하 연기금) 수탁자와 △제도운영에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 △이를 감독하는 감독당국 으로 구분된다.

호주 정부는 지난 2005년 가입자 선택권 확대 및 사업자(연기금) 간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연기금 선택제(Choice of Superannuation)를 도입했지만 가입자 선택에 의한 연기금 변경은 기대만큼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책당국은 이를 계기로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제도에서 가입자의 타성이 매우 중요한 요인임을 인지하게 됐으며, 지속적으로 가입자 행태를 관찰하고 가입자 행동에 기반한 정책을 수정ㆍ보완하게 됐다.

특히 호주의 퇴직연금제도가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호주 정부가 집중 육성하는 디폴트 투자상품(MySuper)에 있다.

디폴트 옵션 제도는 대부분의 연금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운용에 무관심한 상황에서 연금 가입자의 별도운영 지시가 없어도 금융회사가 최적의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호주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퇴직연금기금의 수익률 폭락을 계기로 제도 전반을 점검하고 정부 주도의 디폴트 투자상품 ‘마이슈퍼(MySuper)’ 도입을 권고하기 시작했다.

2013년 7월 1일 이후부터 호주의 퇴직연금 사업자는 사용자 부담금을 수령할 수 있는 디폴트 연기금으로 지정되길 원할 경우 반드시 마이슈퍼 상품을 디폴트 옵션으로 제공해야 한다.

마이슈퍼 상품은 사업자 간 비교가 쉽도록 단순한 설계와 낮은 수수료의 상품이어야 하며 가입자가 적극적으로 투자과정에 관여하지 않아도 안전하게 보존이 되도록 1개 상품 내에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구축해야 한다. 또 표준화된 보고체계적용제외 방식으로 사망보험과 영구장해보험 상품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호주는 마이슈퍼 상품을 도입함으로써 수수료 수준이 1% 이하(0.8%)로 낮아졌으며 적립금 규모가 적은 청년층과 여성이 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슈퍼 상품은 지난해 총 퇴직연금 계좌수 기준 56.3%, 적립금 기준 33.1%의 비중을 차지하며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디폴트 보험 의무화로 국민의 보장갭 완화

호주는 디폴트 투자옵션인 마이슈퍼 상품 설계 시 반드시 디폴트 방식으로 보험상품을 함께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보험계약 형태는 수탁자가 보험계약자, 연기금 소속 가입자가 보험수익자가 되며 계약자인 수탁자가 일별 기준으로 산출된 보험료를 가입자 계좌에서 월 단위로 공제한 후 생명보험회사에 납부하고 보험사고 발생 시 보험금을 청구하는 주체가 된다.

호주의 디폴트 보험은 가입자가 가입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야 가입이 배제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으로 운영된다. 옵트 인(Opt-In) 방식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엄격한 언더라이팅 기준을 적용할 경우 많은 사업비가 소요돼 보험료의 경쟁력이 상실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호주의 생명보험시장은 디폴트 보험제도 도입으로 개인보험보다 단체보험 성장세가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연기금 단체보험을 통한 보험금 지급건수는 20만건을 넘어섰으며, 건당 지급 금액도 6만7000호주달러에 달해 위험보장 기능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연기금에서 제공하는 디폴트 보험의 장점은 단체보험방식으로 가입하기 때문에 보험료가 매우 저렴하다는데 있다.

사용자가 제공해야 하는 디폴트 보험은 사망보험과 영구장해보험(TPD: Total Permanent Disability)으로 보험료는 세전 소득에 해당하는 사용자 부담금에서 자동 공제돼 세후 소득을 활용해야 하는 개인별 가입에 비해 저렴하다.

단체보험에서는 주로 성, 연령, 직종 간 단일률을 적용하는데 이로 인해 위험이 낮은 저연령, 사무직 계층이 위험이 높은 고연령, 생산직 계층을 보조하게 된다. 또 정액 보험료를 사용자 부담금에서 차감하기 때문에 보험료가 높아질수록 취약계층의 투자재원이 감소해 적립금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험연구원은 “호주 정부는 가입자 행동분석을 통해 디폴트 투자상품을 도입하고 인가요건으로 디폴트 보험(사망보험 및 영구장해보험)을 함께 제공해 수수료를 통제함으로써 보장 갭(Underinsurance)을 완화시켰다”며 “다양한 찬반 논쟁에도 불구하고 디폴트 보험이 호주 국민의 보장 갭을 메꾸는 긍정적인 기능이 존재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평가했다.

◆성장 더딘 韓 퇴직연금…디폴트 옵션 고려해야

우리나라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성장이 더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퇴직연금시장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확정기여형제도의 의사결정방식에 대한 검토가 시급하다.

현행 계약형제도에서는 사용자에게 적극적인 제도설계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계약형에서도 가입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일정 규모 이상 퇴직연금사업자에 대해서는 내부 및 외부전문가로 구성되는 ‘연금관리위원회’를 설치해 자신이 제공하는 상품 및 서비스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그 결과를 외부에 공표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정책당국은 디폴트 투자옵션에 대한 지침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퇴직연금사업자 및 가입자가 이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호주정부는 연기금에서 자체 운영하는 디폴트 투자옵션이 가입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감독당국이 직접 디폴트 투자옵션 요건을 제시한 후 요건을 충족시키는 상품만 인가했다. 그 결과 수수료를 낮추고 가입자의 선택 부담을 경감시키는 순기능이 나타났다.

보험연구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계약형 지배구조 하에서 디폴트 옵션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퇴직연금사업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호주의 사례와 같이 사용자 부담금을 수령  하는 퇴직연금사업자는 반드시 디폴트 상품을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하고 감독당국으로부터 인가받은 상품을 제공한 경우 가입자 손실 발생에 대해서는 면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폴트 투자상품의 순기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상품 간 비교가 가능하도록 투명한 공시가 병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공시항목을 목표수익률, 실제수익률, 표준화된 투자리스크, 수수료 등 핵심성과로 집약하고, 수수료는 특정 적립금 수준 대비 금액으로 표현하며 퇴직연금사업자 간 동일한 양식으로 공시함으로써 가입자의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퇴직연금제도 내에서 일정 수준의 위험보장을 제공하는 부분도 지나쳐서는 안된다.

퇴직연금제도를 통해 단체보험을 제공하는 호주의 사례는 찬반논쟁에도 불구하고 비용효과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연기금 수탁자가 단체보험 방식으로 가입하기 때문에 비용 대비 효율성이 매우 높고 적립기간 중 긴급자금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 중도인출에 대한 수요를 실질적으로 축소시키는 순기능을 한다.

보험연구원 이경희 연구원은 “호주의 퇴직연금제도가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퇴직연금기금과 금융회사뿐 아니라 정부와 감독당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며 “국내 도입 예정인 중소기업연합형 퇴직연금기금 설립 시 호주의 디폴트 보험상품 제도를 활용하면 영세사업장 가입자의 긴급자금 수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중도인출 억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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