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염희선 기자>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는 “상위 20% 고객이 80%의 매출을 창출한다”는 공식을 제시한 바 있다. VIP 마케팅의 기반이 되는 이 파레토의 법칙은 국내은행 고액자산가 관련 사업 모델에도 당위를 부여하고 있다. 파레토 법칙에 따르면 소수의 고액자산가들, 즉 VIP 대상 PB(Private Banking)사업이 은행을 먹여 살릴 수도 있다. 고액자산가 유치 성과에 따라 지점 경영평가 순위가 바꿀 수도 있고, 은행 평판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액자산가 셀럽을 따라 다른 고객의 이동도 발생한다.

파레토 법칙을 언급하지 않아도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고액자산가 대상 PB 서비스는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우대서비스를 제공해 관계를 유지하고 고액자산가 이탈을 막는 자산관리형 전략은 저물고, 고객의 자산증식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 투자자문을 실시하는 자산운용형 전략으로 전환하는 성숙기에 이제 막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고액자산가 대상 PB 서비스가 직접 수수료수익을 창출하기에 여전히 한계가 크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본지는 창간 23주년을 맞아 국내은행 PB 서비스의 현황과 변화를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성숙기 접어든 은행 PB

PB서비스의 형태는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고액자산가의 비용절감을 지원하고 우대서비스를 제공하는 VIP뱅킹(아시아형), 고액자산가의 자산보전 등 안정성을 추구하고, 관계를 중시하는 자산관리형(유럽형), 고위험·고수익을 노려 재산 증식을 추구하고 종합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산운용형(미국형)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초 씨티은행이 자산관리서비스를 처음 도입했으며, VIP뱅킹 수준의 PB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후 2010여년까지는 우리나라 고액자산가 다수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해 부를 쌓아왔기 때문에 금융자산의 비중이 낮았고 관리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부동산 이외에도 예금 같은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강해 은행에서 고액자산가의 자산을 적극 운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다. 또한 당시 은행들은 자산운용 역량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에 따라 초기 PB는 법률·세무상담, 수수료 혜택 같은 우대서비스를 중심으로 고액자산가를 지원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가운데 고객쟁탈전이 치열하게 지속되면서 은행은 PB 서비스 대부분을 무료로 제공했으며, 고액자산가들도 PB를 부가서비스 정도로 인식하게 된다.  

‘자문서비스는 무료’라는 인식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은행 PB의 족쇄로 작용했으며, 은행은 투자자문 차별화를 통한 고객자산 증식, 수수료수익 확보라는 PB서비스의 최종 목표 근처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형제 증권사와 협업이 가속화됐고, 전문 인력 양성 정책도 무르익었다. 조직과 영업망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생애주기별 맞춤 종합자산관리서비스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르익어가는 PB 비즈니스

현재 국내은행의 PB 서비스는 체계를 갖춘 상태다. 전용 브랜드와 영업점, 전문 인력이 자리를 잡고 고액자산가를 맞이하고 있다. 

일단 신한은행 ‘신한 PWM’, KEB하나은행 ‘골드클럽’, 우리은행 ‘투체어스’, 국민은행 ‘골드앤와이즈’, 기업은행 ‘윈클래스’처럼 각 은행은 대표 PB 브랜드를 설정했다. 브랜드 기반 통합 전략 실행으로 고액자산가 인식 제고와 전략의 일관성에 힘을 실었다. 국내은행은 PB 영업망도 확충하고 있다. 2012년 기준 15개였던 KEB하나은행 골드클럽은 지난달 기준 25개로 늘었고, 신한은행 PWM센터는 같은 기간 12개에서 27개까지 늘었다. 국민은행은 당시 23개였던 PB센터를 현재 스타PB센터 3개, 골드앤와이즈 PB센터 21개, 골드앤와이즈라운지 64개로 세분화해 확대했다. KEB하나은행의 경우 지난해까지 수도권을 중심으로 PB센터를 운영했지만 올해부터는 대구, 제주, 부산, 대전 등 지방까지 거점을 넓혔다는 특징도 나타냈다.  

특히 은행과 증권 간 복합점포는 PB 영업망 확대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KB금융, 신한금융, 하나금융 등 국내 주요 금융지주사들은 계열 은행과 증권의 협업을 통한 복합점포망을 확대하고, 종합자산관리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PB센터의 다른 특징은 고객 기준 세분화다. 예를 들어 신한은행은 고객자산 규모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눠 준자산가(1억~3억원), 고자산가(3억~50억원), 초고자산가(50억원 이상)로 구분해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있다. 국민은행도 스타PB센터는 30억원 이상 초고자산가 고객군, PB센터는 5억~30억원의 고자산가 고객군, 골드앤와이즈라운지는 3억원 이상 준자산가 고객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종합자산관리도 은행권 PB센터의 특징이다. 신한은행은 PWM센터에서 고객정보 분석, 재무상태 진단, 투자환경 분석 및 투자전략 수립, 포트폴리오 제안·평가·수정 과정을 거친다. 국내펀드를 비롯해 해외펀드, ETF, 자문형랩, 기업어음, 해외주식, ELS와 같은 다양한 투자상품도 제공하고 있다.  

은행 관계자는 “은행 및 증권 협업을 통해 다양한 상품의 교차판매가 가능해졌고, 투자자문 수준도 끌어올릴 수 있었다”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영업망은 충분한 수준이며, 브랜드 전략 역시 일관되게 수행되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브랜드 관리, 영업망 확대 이외에 은행이 신경 쓰는 것은 인재 육성이다. 고액자산가와 신뢰를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력 확보가 필수기 때문. 

KEB하나은행은 PB사관학교를 통해 체계적인 육성 및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PB스쿨 과정 이후, 예비 PB, PB 선발 과정을 거쳐 VIP PB와 골드 PB를 선발한다. 또 워크숍, 세미나, 컨퍼런스콜, 포럼, 팀 회의와 같은 교육과정도 진행 중이다. 수시로는 신임 PB 연수, 금융연수원 연계 자산관리전문가 과정, 대학연계 자산관리 전문가 과정, 전문자격증 취득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문화, 예술, 이미지메이킹과 같은 직원 인성강화를 위해서는 교양문화 연수도 진행 중이다. 인재 육성에서 전 직원의 자산관리전문가화도 은행 PB의 또다른 이슈거리다. 농협은행은 전 직원의 자산관리전문가 육성을 위해 주니어, 시니어, 마스터 등 단계별 교육 과정을 추진하고 있다. 

관계 유지 위한 종합 생애주기서비스도 

고액자산가 관리를 위한 비금융서비스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고객 대상 종합 라이프케어 서비스를 선보였다. 고액자산가 자녀의 만남을 주선하고, 결혼식을 지원한다. 또 장례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현악기 1대1 컨설팅, 고궁투어, 아트세미나, 와인클레스, 인문학 경연, LPGA 골프투어도 고액자산가를 위한 서비스다. 우리은행은 PB고객에게 시크릿뱅킹과 대여금고서비스,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제공하고 있다. 호텔, 헬스케어, 웰빙푸드, 골프 관련 제휴서비스도 제공해 관심을 모았다. 기업은행은 찾아가는 VIP 자산관리 컨설팅인 ‘톱(TOP)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감성·문화서비스인 음악회 및 콘서트 제공, 고객 경조사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고액자산가 자녀 중 미혼남녀의 일대일 만남을 주선하는 서비스를 통해 전문 커플매니저와 일대일 대면상담을 진행하고 최적의 상대를 추천해주고 있다. 농협은행은 은행 특색에 맞는 농협몰 할인, 주말농장 지원, 농촌체험관광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 관계자는 “고액자산가의 인맥 형성에 도움을 주는 관계형서비스가 각광 받고 있다. 따라서 각종 제휴업체를 찾아 고액자산가가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 선정에 힘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수수료수익 창출은 ‘의문’

PB 서비스가 발전하고 있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바로 수수료수익과의 연계다. 

국내은행은 여전히 투자자문과 각종 컨설팅을 무료로 여기는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수수료수익을 올리는 PB 서비스 분야도 부동산자문 등으로 제한적이다.

과거보다 투자자문의 질을 끌어올리고, 각종 생애주기 서비스를 추가했지만 여전히 펀드나 방카상품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얻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PB 서비스의 초점 자체가 고액자산가의 이탈 방지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은행 관계자는 “고액자산가의 예금유치에 따른 예대마진 수익 비중이 가장 높다”며 “최근 전세계 투자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적극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도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료였던 서비스에 수수료를 추가하면 고객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PB의 낮은 국제투자 전문성도 수수료수익 부과의 벽이다. 국내은행의 국제화 역량 부족으로 해외주식이나 해외부동산투자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은행 PB센터에는 세무전문가, 법률전문가, 상속전문가 같은 다양한 전문가들이 있지만 해외투자 전문가는 많지 않다. 

일부에서는 초기 PB센터 설립 비용이 낭비라는 지적도 나온다. 화려한 PB센터에 대한 고액자산가의 선호는 의외로 높지 않고, 초기 비용부담이 늦은 수익성 창출로 이어져 조급성만 키운다는 비판이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증권사와 협업을 통해 투자자문 역량을 끌어올리고, 각종 제휴를 통해 컨설팅의 질이 상승하고 있다”며 “하지만 아직도 국내은행이 자문수수료를 부과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외부인재 영입, 해외투자자문 역량 확보를 통해 초고액자산가 대상 수수료 창출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