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일제 전시동원체제 가동, 소주·청주 주류배급제 시행
막걸리도 원료 40% 잡곡 넣어 빚고 생산량도 20% 줄여 생산

일제 강점기 일본의 탄압 속에 우리말을 지켜려 했던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 ‘말모이’의 포스터 (자료 : 롯데엔터테인먼트)
일제 강점기 일본의 탄압 속에 우리말을 지켜려 했던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 ‘말모이’의 포스터 (자료 : 롯데엔터테인먼트)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올 1월에 개봉한 ‘말모이’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영화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부족한 자원으로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려 각종 자원을 수탈하고, 식민지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각종 민족단체를 폐쇄시키며 창씨개명은 물론 우리말 사용을 전면 금지시킨다. 말모이는 1942년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과 우리말대사전 편찬 작업을 영화화한 것이다.

1941년 당시 일제는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며 소주와 청주에 대한 배급제를 시행했다. 사진은 김판수가 한글을 깨우치고 성냥개비로 자모를 쓰다가, 마지막 ‘ㅇ’자는 소주잔으로 대체하는 장면 (자료 : 롯데엔터테인먼트)
1941년 당시 일제는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며 소주와 청주에 대한 배급제를 시행했다. 사진은 김판수가 한글을 깨우치고 성냥개비로 자모를 쓰다가, 마지막 ‘ㅇ’자는 소주잔으로 대체하는 장면 (자료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러다보니 술 이야기는 중심에 서지 않는다. 물론 술 마시는 장면도 많지 않다. 하지만 일자무식 김판수가 성냥개비로 한글 자모를 써나가는 장면과 일본경찰이 조선어학회 공간을 습격하던 날 김판수와 류정완 등이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은 영화의 스토리를 단단히 다져주는 양념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김판수가 마신 푸른 색병의 소주와 류정완이 판수의 패거리와 마신 막걸리가 궁금해졌다. 그것도 1941년, 일제의 막바지 탄압이 개시되던 시점의 서울(당시 이름은 경성) 사람들의 술은 어떠했을까.

일제 강점기의 자료는 당시 발간되던 신문과 잡지 등으로 일정하게 모습을 복원할 수 있지만 우리 글로 쓰인 신문 잡지가 폐간되던 1940년 이후의 상황은 자료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더욱이 술과 관련 발간된 책자는 1935년 조선주조협회가 중심이 돼 호소이 이노스케가 엮은 <조선주조사>가 유일한 상황. 따라서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그나마 전시동원체제를 연구해온 일부 역사학자의 자료와 1930년대 말부터 1940년까지 발행된 신문 기사로 일부나마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우선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이 음용했던 술은 막걸리다. 동아일보 1934년 2월 기사를 보면 1933년 서울 사람들은 9만9190석(1만7854㎘)의 술을 마셨으며 38만의 당시 서울 인구가 1인당 4.76리터의 술을 마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술과 건강에 관한 국제보고서 2018’에서 밝힌 한국인의 평균 알코올 섭취량 10.2리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렇다면 이 중 가장 많이 마신 술은 무엇일까. 당연히 1988년까지 국내 1위 자리를 지켜온 막걸리로 전체 음용량에 45%에 달한다. 그 다음은 약주로 2만4600석(4,428㎘)을, 그리고 청주가 1만5590석(2,806㎘)으로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요즘 맥주 다음으로 많이 찾는 소주는 어떠했을까. 3400석(612㎘)으로 청주 뒷자리를 차지했고 맥주는 2000석(360㎘)으로 마지막 순위에 기록됐다.

소주와 맥주가 가장 적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가격 때문이다. 가격이 비싸니 찾는 사람이 적었고, 특히 소주는 당시 서울 사람들이 계절술로 여겼다. 6.25 전쟁 이전까지 한여름에나 마시는 술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생산되던 소주가 알코올 도수 30~35도 정도였으니 더운 여름을 넘길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여름에나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술이 사계절 소비된 것은 해방공간과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소주를 즐기는 이북 출신들이 많이 내려오면서부터다.

그나마 1937년을 분기점으로 희석식소주의 공급량이 급증하게 되는데, 이는 에너지 확보정책에 따라 대형연속식증류기를 도입시켜 95% 이상의 알코올을 함유한 주정을 확보하려는 총독부의 독려가 있었던 탓이다. 주정 자체가 연료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시던 술들도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배급제가 시행된다. 탁주를 제외한 청주와 소주는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의 분배정책에 따라 생산이 제한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1940년도에 발행된 신문에는 ‘술에 물을 타거나 부패를 막기 위해 인체에 해로운 부패방지제 등을 넣는 행위를 엄벌하겠다’는 기사는 물론 ‘주류 품귀에 따라 밀조주 생산이 증가’한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이와 함께 한잔에 3전하던 탁주를 5전으로 판매한 술집 주인을 취조한다는 1단짜리 기사까지 등장할 정도로 술은 귀한 존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탁주도 절미를 이유로 20% 정도 생산을 줄여야 했고, 원료 또한 40% 정도의 잡곡(조, 수수, 쌀보리 등)을 혼용해야 했다. 이처럼 술의 품질이 저하됨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가 될수록 막걸리를 공급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져 전표제도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즉 김판수가 마신 술은 값싸게 만들어진 알코올 도수 30도 정도의 희석식 소주일 것이다. 그리고 탁주는 잡곡이 40% 정도 들어간 쌀로 빚은 술일게다. 물론 발효제는 우리 누룩이 아니라 일본식 입국이었을 것이다.

영화 ‘말모이’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말과 글을 지켜낸 자랑스런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술은 원형을 상실하고 일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지속됐으며, 그 모습을 해방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 겨우 10~20여 년 전부터 우리 술의 원형을 찾는 움직임이 일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문화는 지키는데도 큰 힘이 필요하지만 복원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말모이 속 우리말처럼 우리 술도 원형을 되찾고 우리가 사랑하는 술로 거듭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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