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노르망디 지역 사과로 만든 사이다 증류해서 만든 술
레마르크 소설 ‘개선문’에선 ‘피난과 안식’의 상징으로 쓰여

개선문 영화 포스터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파리는 근대의 기준점이자 지난 두세기 동안 유럽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운 도시이기도 하다. 19세기 혁명의 소용돌이가 유럽을 휩쓸던 시절, 파리는 잉태했던 근대정신을 대륙 곳곳에 확산시켰던 아방가르드(전위)였으며, 혁명의 물결이 휩쓸고 간 뒤에 맞은 ‘벨 에포크’ 시절의 파리는 유럽에 문화적 자양분을 공급해주던 화수분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파리는 많은 이야기를 가지게 됐고, 그 이야기들은 문화를 넘어서는 문명의 자리까지도 넘볼 만큼 자존감이 가득 담긴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파리는 근대라는 시공간을 넘어서, 식문화와 관련한 기준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흔히 간과한다. 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이 기준은 버터와 올리브유, 그리고 와인과 사이다와 관계가 있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파리를 기준(북위 48.9도)으로 북쪽은 차가운 한랭성 기후 때문에 올리브와 포도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의 국가에서 흔히 요리에 사용하는 올리브유보다 버터를 사용한 요리가 많고, 좋은 포도가 나지 않아 다른 과일로 빚은 발효주와 증류주를 주로 마신다는 것이다.

그런 술중에 대표적인 것이 노르망디로 유명한 칼레 지역에서 생산되는 칼바도스가 있다. 칼바도스는 대부분의 유명한 유럽 술들처럼 지리적 표시제를 사용한 술의 이름이며, 노르망디 지역에서 생산하는 사과를 발효시킨 사이다를 증류해서 얻은 술이다.

여기서 또 왜 사이다를 술이라 부르는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마트에서 보는 사이다는 이산화탄소를 주입한 탄산음료이며, 원래의 사이다는 사과를 발효한 술을 의미한다. 이를 프랑스에선 ‘시드르’라고 부르고 스페인에선 ‘시드라’라고 칭한다.

이 술을 증류한 것을 흔히 ‘오드비(생명의 물)’로 불렸는데, 프랑스에선 지역명을 술 이름에 붙여 칼바도스라고 한 것이다. 미국에선 동증류기를 만들 수 없었던 초기 식민지 시절, 겨울의 추운 날씨를 이용해 얼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높은 알코올 도수의 술을 얻어냈는데(동결 증류), 이를 애플잭이라고 불렀다.

파리와 칼바도스, 그리고 개선문

그런데 프랑스의 사과 증류주인 칼바도스와 파리, 그리고 개선문이 연결되는 소설이 하나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바로 그것. 벨 에포크가 끝나고 1차 대전으로 유럽은 전쟁터로 변한다. 승자와 패자는 있었지만, 전쟁의 상흔이 너무 컸던 이 전쟁의 결과는 승자에게도 잔혹했다. 그리고 새로운 전쟁까지 20여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때를 흔히 역사학자들은 ‘전간기’라고 부른다.

평화가 다시 찾아온 이 시기 파리는 다시 전 세계의 낭만적 문인과 가객, 예술가들을 불러들인다. 파리가 다시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이후 파리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망명객과 난민, 그리고 불법체류자. 쫓고 쫓기는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파리는 안식처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가려야 했던 은신처이기도 했다.

<개선문>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파리를 안식처와 은신처로 두고 생활해야 했던 독일인 망명의사 라비크와 이탈리아 출신의 삼류 배우 조앙마두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지만 불법체류자여서 정식으로 취업할 수 없었던 라비크, 그리고 우연하게 그를 만나면서 삶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조앙마두의 사랑은 전간기가 갖는 회색의 이미지만큼 불안하기만하다.

이 소설은 1948년 영화화하게 되는데, 잉그리드 버그만과 사를르 보와이에가 각각 주연을 맡아 쓸쓸한 망명자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칼바도스’는 두 사람의 영혼을 구해주고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 우연히 개선문 인근에서 만난 두 사람은 카페에서 칼바도스를 마시게 된다. 그리고 주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두 사람은 칼바도스에 담긴 메타포를 음용한다.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의 책으로, 또는 지금은 사라진 TV프로그램 ‘명화극장’의 흑백화면으로 만났던 <개선문>은 이렇게 낯선 프랑스의 사과증류주를 우리에게 ‘피난과 안식’의 이미지로 다가오게 한 것이다. 그 덕에 지금도 개선문 인근의 카페를 찾는 우리 관광객들은 ‘칼바도스’ 한 잔을 시킨다고 한다. 

칼바도스는 꼬냑이나 알마냑과 같은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보다 저렴한 편이다. 물론 <개선문>의 주인공들이 그 술을 찾아 마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포도나무를 강타했던 필록세라(포도뿌리혹벌레) 덕에 물 만난 고기처럼 생산이 늘었던 술, 칼바도스. 하지만 최근에는 오크통 숙성을 길게한 고급 버전도 등장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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