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8 22:35 (일)
[수불시네마기행9] 시를 영상과 대사로 보여주는 영화 ‘일 포스티노’
[수불시네마기행9] 시를 영상과 대사로 보여주는 영화 ‘일 포스티노’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4.08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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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의 포스터 (자료 : 네이버 영화)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의 포스터 (자료 : 네이버 영화)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영화에 시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구성요소인 카메라, 대사, 조명, 소품 등은 시의 운율처럼 영화 내부에 리듬을 담아낼 수 있는데다 메타포까지 실을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가 갖는 전달력은 무엇보다 크기 때문에 시의 울림처럼 강력하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자칫 텍스트 중심의 시에 방점을 두다보면 영화의 긴장감을 잃고 관객의 시선을 놓치는 식상한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를 영화에 담아내기는 쉬워도 감독들이 선뜻 시를 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24년전 개봉된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2017년 국내 재개봉)는 영화 자체가 시의 구성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서도, 영화적 완성도는 물론 극적 재미까지 챙기고 있는 보기 드문 영화다.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이탈리아의 국민배우 마시모 트로이시와 영화감독 마이클 래드포드가 이탈리아 버전으로 일부 내용을 번안해 영상으로 옮긴 이 영화는 소설의 제목처럼 칠레의 민중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를 다루고 있다.

유명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아옌데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까지 망명과 가택연금을 수시로 당한다. 영화는 칠레의 가택연금 상황을 이탈리아로의 망명으로 연결시켜 네루다가 풍찬노숙하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잠시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인연을 감독은 놓치지 않고 연결시켰던 것이다.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 마리오. 브랜디 한잔을 옆에 두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자료 : 네이버 영화)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 마리오. 브랜디 한잔을 옆에 두고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자료 : 네이버 영화)

그러나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세우기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인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 역)가 네루다와의 대화를 통해 ‘시’를 알게 되고 시적 체험을 한 뒤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겨우 글을 읽을 수 있었던 마리오가, 그래서 ‘은유’가 무엇인지, ‘운율’이 무엇인지 몰랐던 그가 네루다의 조언대로 바닷가를 거닐고, 사물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궁극에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된 베아트리체에게 접근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 체화된 ‘시’를 말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단순하게 마리오와 베아트리체간의 사랑 이야기로 채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를 뼈대에 두고 시와 사랑을 살과 근육으로 붙여 넣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전혀 관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1994년 안팎의 이탈리아의 정치현실은 부패한 정치인들로 격변을 겪던 시절이다. ‘마니뿔리떼’, 이탈리아어로 ‘깨끗한 손’을 의미하는 정치개혁이 진행되던 시절, 이 영화와 자신의 목숨까지 바꾼 마시모 트로이시는 영화 속 등장인물 마리오처럼 각성하는 시민에 의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등장하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통해 이탈리아의 민낯을 보여주면서 무지렁이 같아 보였던 사람도 변화의 동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메시지를 읽는 것이 <일 포스티노>를 보는 재미일 것이다. 그리고 귀에 익숙한 영화음악(아카데미 음악상)은 덤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든든한 응원군이라 하겠다.

네루다와 포도주
이 영화에서의 술은 소통의 도구이다. 시적 소통은 물론,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결과정에서 술은 배경으로 나타난다. 또한 마리오와 베아트리체 간의 사랑의 결실인 결혼식에서 술은 클라이맥스처럼 등장한다. 적포도주와 브랜디, 모두 이탈리아의 술이다.

그런데 소설에는 네루다가 즐겨 마신 칠레의 포도주가 등장한다. 영화가 소설을 이탈리아 버전으로 번안한 결과이니 당연할 것이다. 네루다가 즐겼던 포도주는 6대째 와인을 빚고 있는 쿠시뇨 마쿨의 와인이다. 칠레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의 와인을, 그 중에서도 장기숙성형 포도주를 즐겼다고 한다.

네루다가 와인을 즐길 만한 배경은 충분해 보인다. 시인이었던 점도 있지만 그의 고조부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고 고향인 파랄은 떫은맛이 나는 포도주의 주산지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이 젊었을 때도 지금처럼 칠레는 포도주 수출국이었지만 보헤미안의 삶을 살던 자신들의 호주머니 사정으로는 너무 비싼 술이라고 회고하고 있다기도 하다.

그가 남긴 ‘포도주에 바치는 헌시’(국내 미번역)를 보면 포도주의 맛과 향, 그리고 질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온전히 담겨져 있다. 그런 포도주는 그의 언어를 통해 ‘진한 핏방울’로도 등장하고 ‘황소의 피’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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