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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불시네마기행10]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것
[수불시네마기행10]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것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4.22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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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클레인 형제 통해 20세기 초 미국 기성질서 고발한 영화
2000년대 주당 사로잡은 폭탄주 원형 ‘보일러 메이커’ 등장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 포스터 (출처 : 다음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 포스터 (출처 : 다음영화)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변화 없는 기성을 거부하는 아우는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사회제도와 관습, 질서 등에 온 몸으로 저항한다. 뚜렷한 성과가 없어도 강의 본성을 닮은 그는 지친 표정 없이 강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듯 고정관념과 타성을 거부한다. 한마디로 체제와의 비타협이다. 불협화가 발생해도 그것은 자신의 삶 속의 파격, 그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유학을 떠나 7년 만에 박사가 돼 귀향한 형은 순응하는 삶에 익숙하다. 다치고 쓰러지면서도 저항하는 아우의 모습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도와주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저항의 힘은 애초에 통제될 만큼 미약하지 않았고 형은 그런 반골에 익숙하지 않아 방법조차 강구할 수 없다. 체제와 관습 내부에서 작동하는 자신의 일은 너무도 잘 해결하고 대처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세상에 대해선 연민할 도리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둘, 혹은 두 형제에게 신의 섭리를 익히는 과정으로서 낚시와 글쓰기를 가르친 아버지까지 포함해서 셋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은 몬태나의 블랙풋 강으로 낚시를 나가는 정도다.

노먼 맥클린의 자전적 소설을 1992년 영화화한 ‘흐르는 강물처럼’에 등장하는 아우 폴(브래드 피트 분)과 형 노먼(크레이크 셰퍼 분)의 이야기다. 현실에서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비일비재했고 종교가 모든 삶의 지표처럼 자리매김돼 있어, 술의 폐해를 문제 삼아 정치권마저 두 손 들고 금주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소설과 영화 속 배경이다.

특히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20세기 초, 더 정확하게는 제1차 세계대전과 금주법, 그리고 대공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현대 미국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다. 영화 속에는 이 격동의 현장이 간헐적이고, 간접적으로 담겨지지만, 우리는 아우 폴이 보여주는 시대와의 비타협을 통해 상처입고 변화해 가는 미국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형인 노먼의 내레이션으로 읽으면 그의 회상이 주된 이야기로 보여질 수 있지만, 그 회상과 추억의 주인공은 폴이기에 아우의 스토리로도 읽혀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삶이란 그런 것, 마치 ‘흘러가는 것은 모두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쉬는 법이 없구나’라는 <논어>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여기에 ‘아름다움’과 ‘도움’이라는 가치가 폴을 중심에 두고 종교적 잠언처럼 등장한다.

낚시는 물론 글쓰기, 그리고 폴이 푹 빠져있던 도박에 이르기까지, 그는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어린 시절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은 ‘귀리스프’를 거부한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의 인생은 그렇게 노정돼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아웃사이더였던 폴, 그래서 그가 마신 술도 저항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금주법 시대였으니 시대 자체가 저항을 유도했지만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술은 버번위스키와 맥주, 그리고 그 둘을 섞어 마시는 맥주 칵테일 ‘보일러 메이커’ 등 세 종류. 그 중 보일러메이커는 생맥주잔에 위스키 스트레이트 잔을 떨어뜨려 마시는 술이다. 모양을 보면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즐겨 마셨던 ‘양주폭탄주’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폭탄주를 설명하는 글에 ‘흐르는 강물처럼’의 폴과 노먼이 마신 보일러메이커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그런데 보일러메이커의 어원이라든지, 폭탄주의 역사만큼 중요한 것은 이 술에 담긴 주당들의 생각이다. 주인공 폴이 형 노먼과 마신 보일러메이커는 금주법이라는 체제에 저항했던 술이라면 1990년대의 우리의 ‘양폭’은 양주를 독점할 수 있었던 주류계층의 술 문화를 담은 권위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런 점에서 ‘양폭’이 체제의 술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 애주가들이 찾은 ‘소주폭탄주’와 ‘오십세주’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술을 창출해낸, 일종의 저항정신을 담은 술이라 할 수 있다.

알코올 도수 4~5%의 맥주와 17~18%의 소주는 소득이 늘어나도, 미식을 찾는 계층이 많아져도 변화하지 않았다. 그 한계에 식상했던 주당들은 주류 대기업이 공급하는 그 술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황금비율을 찾아내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알코올 도수의 술을 즐겼던 술 문화이기도 했다.

수제맥주가 시장에 출시되고 외국의 다양한 와인과 맥주가 수입되는 2010년 이후, 그 술 문화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소폭은 하나의 장르가 됐을 만큼 유효하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술을 혼합해서 마시던 술은 꼭 위스키와 소주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러시아의 술 중에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1:4~5비율) 마시는 ‘요르쉬’라는 술이 있는 것을 보면 다양한 술을 찾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감성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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