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글라스 권위주의 리더, 부정적 이미지로 오해
올바른 소통 위해 카리스마의 긍정성 확대해야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카리스마와 소통은 양립가능한가. 오랫동안 리더의 핵심 덕목으로 거론됐던 카리스마. 하지만 최근에는 카리스마를 강조하기보단 소통을 중시하는 리더의 모습이 더 자주 언론에 노출된다. 카리스마가 일방통행을 연상시킨 탓일 것이다. 금융권의 리더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은행장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대표들의 동선을 확인하면 산행, 치맥파티, 프로야구 응원, 영화관람 및 현장 방문 등의 일정이 자주 눈에 띈다.

직원들과 취미활동을 공유하거나 스트레스를 같이 풀면서 식사 한 끼 혹은 가볍게 술 한 잔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워라밸’까지 결합시켜 좀 더 포근한 리더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정에 따른 CEO의 동선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직원들과 내부 메신저를 통해 개별적인 대화를 한다든지, 프레젠테이션 부담을 덜기 위한 파워포인트 형식의 문서를 없앤다든지, 아니면 회의 자리의 지정석을 없애거나 보고방식을 대폭 간소화시키는 등 보다 편하게 임직원들이 만날 수 있는 환경도 조성 중에 있다.

즉 일하는 방식과 CEO의 동선 모두가 소통을 중심 화두로 삼고 계획되고 또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통이 리더십의 주요한 덕목으로 전면에 내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전형적인 캐릭터인 카리스마는 입지가 축소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카리스마는 할 일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더 이상 리더의 미덕으로 자리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양가적 태도를 함께 갖추고 있는 신비감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고양시키거나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갑질하는 권력자가 아닌 소박한 삶의 태도를 통해 종교적 성스러움이 깃들기도 하는, 그래서 자신의 열정적 태도로 인해 대중들이 그에게 의존하는 자석 같은 마력을 소유한 카리스마가 현재의 리더들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알리는데 소극적일 뿐. 이유는 앞서 말했듯, 카리스마가 자칫 권위주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먼 산을 바라보거나 손을 앞으로 뻗어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일부 정치인들의 권위주의적 태도가 카리스마의 모든 것으로 몰이해됐기 때문에 발생한 잘못된 해석인 것이다.

카리스마의 태생은 잘 알려져 있듯 종교다.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서 등장했지만, 정치적 의미가 담겨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막스 베버가 이 개념을 사회학에 적용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줄곧 강한 리더십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면서 지난 20세기를 관통한다. 

전체의 뜻을 빠르게 모아 집행되는 모습이 효율성으로 보이면서 가장 좋은 리더십의 전형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카리스마의 긍정적 측면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카리스마를 권위주의적 태도로만 이해하면서부터,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카리스마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다양성이 카리스마를 위축시켰지만, 카리스마의 기능을 사장시키진 않았다. 오히려 다양성으로 인해 우리는 카리스마의 긍정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삶의 태도와 언변에서 비롯된 긍정적 감수성이 상대방에 대한 설득으로 이어지면서 대화가 가능해지고, 이 과정에서 보다 유연한 소통이 가능해지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카리스마와 소통의 접점이 되기 때문이다.

즉 리더의 소통을 강조해 좀 더 현대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카리스마가 존재해야만 실질적인 리더십이 기능한다는 점에서 굳이 카리스마의 리더십 기능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핵심화두인 세상에서, 변화와 혁신을 당대의 과제로 설정하고 집행하는 기업이라면 더욱더 카리스마의 긍정성을 리더십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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