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규 KEB하나은행장
지성규 KEB하나은행장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신화는 한 집단의 존립을 위해 오랜 기간 공유된 조직화된 사유다. 따라서 세대를 이어가며 공유되기도 하고, 외부 집단의 침략 등 위기의 순간 전체를 하나로 묶는 심리적 공감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신화적 발상 중에 지금의 시선으로 해석하면 이해되지 않는 사례들은 부지기수다. 신화 시대에는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상당부분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지의 영역으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그런 발상 중 재미있는 사례 하나를 들어본다. 잘 알고 있듯이 피타고라스는 세상을 수학으로 읽으려 했던 그리스의 철학자다. 그를 따랐던 제자들은 철학공동체이자 폐쇄적이고 신비주의적 성향의 종교 집단을 구성한다. 이를 피타고라스학파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 학파에선 수학적 사고로 세상을 사고하고 사유한다.

그런데 이 학파의 계율 중에 콩을 먹지 않는다는 것과 제비집을 집안에 두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수학적 사고와 콩, 그리고 제비집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물론 납득 가능한 당시의 사고 흐름은 존재한다. 콩은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우리의 제사상에 팥이나 콩고물이 입혀진 떡이 올라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즉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사고에서 콩은 삶과 죽음 모두를 담고 있는 양의적 존재였고, 그런 점에서 피타고라스는 콩을 멀리했던 것이다. 그것은 제비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계율 탓에 신비주의적 집단으로 보였겠지만 플라톤의 피타고라스에 대한 평가는 남다르다. 그의 책 <국가>에는 “그는 충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을 지도하고 이끌었다.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오늘날까지 피타고라스학파의 지지자들과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하는 삶의 비법을 전수했기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다. 집단을 구성한 리더로서 최상의 칭송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폐쇄적인 집단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20세기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집단과 조직은 더욱 그러하다. 오죽하면 패거리 문화를 빗대 폐해라고 규정하고 혁신의 대상처럼 이야기하겠는가.

도널드 서순은 자신의 책 <유럽문화사> 1권에서 “혁신적이거나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문화는 과거와 단절하고자하는 자의적인 욕망이다”라고 말한다. 혁신과 전위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과정이므로 기존의 관계를 부정하고 과거와 단절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전위에 서려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욕망이며, 그 욕망의 힘으로 창의를 전면에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성규 KEB하나은행장이 최근 은행내 기수문화를 폐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제도가 여러 장점을 갖고 있지만 대표적인 단점이 선발된 사람들끼리 갖게 되는 폐쇄적 문화다. 그 폐쇄성은 연공서열 문화로 연장되면서 외부에서의 문화적 접근을 원초적으로 봉쇄하게 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몇 번에 걸친 상전벽해를 단 몇 년 만에 해치우듯 변신을 일상화하고 있다. 변화의 원동력을 내부에서 다 찾을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무리 조직 구성원이 많아도 인적 자원의 한계는 금방 노출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것인지 행장이 앞서서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기수’라는 단어 대신 입행연도를 쓰라고 했단다.

물론 이마저도 없애야할 용어다. 단기적으로 직장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라 생각하겠지만 결국 서열 문화의 잔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며 창발적 아이디어가 조직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수평적이며 개방적인 은행 문화 도입을 주문해본다.

신화는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것이며 매일 반복되는 평상의 순간에는 일상을 지배하는 물적 토대에 근간한 문화와 질서가 더 소중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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