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0 23:35 (토)
[수불시네마기행18] 위·알·못도 괜찮아 영화 ‘엔젤스 쉐어’
[수불시네마기행18] 위·알·못도 괜찮아 영화 ‘엔젤스 쉐어’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19.12.30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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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잘못이 아니야”라고 포근히 안는 켄 로치 영화
아일레이 스카치위스키와 젊은 루저, 씨·날줄로 엮어내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거머쥔 켄 로치 감독의 2012년 영화 '엔젤스 쉐어'의 영화 포스터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거머쥔 켄 로치 감독의 2012년 영화 '엔젤스 쉐어'의 영화 포스터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열패감에 휩싸인 도시 주변부 청년들의 삶은 단속적이고 조화롭지 못하며, 게다가 자신의 감정이나 외부 시선이 집중되면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거칠고 까칠하고 반항적이다. 일정한 직업도 갖지 못하고 큰 죄는 아니어도 법을 어기기 일쑤여서 구치소나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들. 흔한 말로 루저들이다. 

영화의 무대는 청년실업률이 하늘을 찌르던 지난 2012년의 영국, 글래스고어.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의 도시다. 소소한 범죄로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네 사람의 젊은이와 이들의 사회봉사 감독관(해리, 존 헨쇼 분)간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영화 〈엔젤스 쉐어〉다.

위스키를 좀 아는 사람들은 ‘엔젤스 쉐어’라는 단어가 익숙할 것이다.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 넣어 숙성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부분을 의미하는 말이다. 연간 2~3% 정도가 증발해 사라지게 되는데, 이를 ‘천사들의 몫’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됐다.

이 영화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줄거리만을 따라가면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회적 일탈을 다룬 B급 드라마로 보인다. 여기에 고작 스카치위스키와 관련한 이벤트 정도가 극을 이끌어가는 소재가 될 뿐이다.

그런데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거머쥔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인데, 그렇게 만들었겠는가. 마치 1984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파업이 지난 사회적 의미를 빼고 〈빌리 엘리어트〉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사회적 의미는 사라지고 단지 천재성을 갖춘 탄광촌 출신의 무용수가 백조로 비상한다는 내용 정도로 상투성과 억지 교훈 주입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 말이다.

스스로는 루저, 시스템에선 방치자로 내몰린 네 명의 젊은이들은 법원의 사회봉사활동 명령을 받고 해리라는 감독관을 만나게 된다. 해리는 시음회를 스스로 찾을 정도로 스카치위스키를 좋아하는 인물.

하루는 이들에게 위스키를 소개하고 극중 주인공인 로비(폴 브래니건 분)가 천재적 후각을 지닌 것을 알게 된다. 위스키에서 이탄향과 바다 냄새 그리고 소금기까지 찾아내는 한편, 매운맛을 찾아내면서 발효 기간이 짧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선 위스키를 마실 때 사용하는 맛 표현이 가득하다.

이렇게 로비의 천재성이 감독관을 통해 일깨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궤도를 달린다. 한 번도 자신들의 쓰임새에 대해 고민해본 적 없는 사회적 루저가 쓰임새를 발견하고 노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찾아 나서게 된다.

물론 이렇게 평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누가 영화를 보겠는가. 그것도 가장 진보적 시각의 감독이라 일컬어지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말이다.

지난 2012년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영국 청년들의 실업률은 대략 9%대. 어떤 글에 따르면 100만명 정도의 젊은 실업자가 있다는 것을 보고 켄 로치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2019년의 우리는 어떠한가. 8%대의 청년실업률. 수치로는 당시 영국보다는 낮지만 OECD 평균으로 따지면 우리는 평균보다 높은 상황이다. 대학입시는 물론 취업, 그리고 결혼까지, 경쟁의 끝판왕처럼 각종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젊은 계층들.

그런데 이들이 우리의 증류 소주는 알고 있을까. 100년 전 서울에서 즐겨 마신 술이 삼해주와 향온주라는데, 이 술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있을까. 증류한 소주가 지초를 통과하면서 붉은빛을 띠게 되는 홍소주(홍주)가 진도의 특산품이기 이전에 한양의 도성에서 임금이 즐겨 마신 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엔젤스 쉐어〉 좌절했던 영국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함께 ‘위·알·못(위스키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도 너희들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고유의 전통주 이름을 모르는 것은 전적으로 젊은이의 잘못이 아니다. 술을 먼저 배운 선배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쌀을 통제하면서 술을 조세의 수단으로만 바라보았던 국가시스템, 그리고 문화에 깃든 우리 문화를 등한시했던 정부의 잘못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더 나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고, 100년 전 한양 도성 사람들처럼 우리 술 한잔을 귀하게 마실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너희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영화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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