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악습 없애고 여성 진출 늘리며 작품성에 투자
상위 금융사 여성 임원 5%도 안돼…’유리천장’ 여전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 4개의 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사는 물론 92년 미국 아카데미상의 역사도 바꿔 써야 할 만큼 〈기생충〉이 남긴 기록은 대단하다. 그런데 이 기록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수상 이후 펼쳐질 새로운 그림들은 아무도 예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자는 〈기생충〉의 4관왕 수상이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근거는 최근 2~3년 동안 오스카상이 백인 남성 중심으로 진행돼 온 탓에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작품상 수상 과정에서 제작자인 이미경 CJ 부회장의 수상소감을 두고 뒷말을 내놓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거의 뒷받침해준 CJ의 존재감을 굳이 나서서 확인해야 했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기생충〉은 운이 좋아서, 아카데미 측이 돌파구처럼 찾은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스카상 수상까지 젊은 신진 감독과 여성 투자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88만원 세대>의 작가 우석훈 박사가 몇 해 전에 출간한 <민주주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라는 책에 이러한 노력의 일단이 잘 표현돼 있다. 즉 국내 영화산업이 어떻게 권위주의를 탈피하면서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도 대규모 투자와 관련한 결정은 일부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밀실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판도 과거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특히 돈을 가진 일부의 남성들과 영화인들이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인적관계를 확인하면서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유명 감독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이 이번에 오스카를 수상한 봉준호, 박찬욱, 류승완 감독 등이다. 신예 감독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유명인사가 이들을 룸살롱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은 에스프레소를, 류승완 감독은 우유를 마셨다고 한다. 즉 더는 밀실에서 영화 투자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영화판에 등장한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에 가장 마음에 걸렸던게 영화인들이 룸살롱 가는 문화였다”며 “처음 영화사를 차릴 때 이름을 ‘NRS’라 지으려 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NRS는 ‘노 룸살롱’의 약자였다.

이처럼 룸살롱을 거부하는 신진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영화 투자의 큰 그림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룸살롱에서 몇 사람의 남자가 결정하던 산업에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게 되고, 인간적인 관계보다 공정한 기준과 작품성을 근간으로 투자가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즉 이미경 CJ부회장이 영화 등의 문화산업에서 제작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남성 위주의 ‘꼰대문화’가 사라지면서 가능했던 것이고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가 영화판에서 제작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 가능해졌다. 그리고 2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한국 영화의 오스카 수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유 없는 변화는 존재할 수 없다. 꼰대문화가 사라지면서 영화산업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산업은 어떠한가. 밀실에서의 의사결정은 사라졌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대규모 투자는 일부의 남성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금융산업도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금융권 여성임원 비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은행과 금융지주, 그리고 주요보험사와 증권사의 여성임원 현황을 살펴보자.

통계는 지난해 9월과 올 1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은행과 금융지주의 임원 총수는 143명이지만 여성임원은 6.3%인 9명에 그친다. 보험사와 증권사로 가면 더 비극적이다.

통계를 위해 조사한 21개의 금융회사 전체 임원은 752명이며, 그중 여성 임원은 32명이다. 고작 4.25%이다. 지극히 초라한 수치다. 이런 환경에선 밀실이 여전할 수밖에 없다.

즉 여전히 여성들은 유리천장의 벽에 막혀 있고, 그 벽은 꼰대문화를 튼튼하게 유지해주는 훌륭한 진입장벽 역할을 대신해준다. 밀실을 없앤 영화산업의 성장을 부러워만 할 것인가. 이젠 고민으로 끝나면 안 된다. 실행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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