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포항에 위치한 동해명주에서 최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지역의 설화를 술이름으로 채택했다. 연로랑(알코올 도수 12도)과 세오녀(6도). 각각 포항쌀로 빚고 감미료를 넣지 않아, 드라이한 맛을 띄고 있다. (사진=동해명주)
경상북도 포항에 위치한 동해명주에서 최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지역의 설화를 술이름으로 채택했다. 연로랑(알코올 도수 12도)과 세오녀(6도). 각각 포항쌀로 빚고 감미료를 넣지 않아, 드라이한 맛을 띄고 있다. (사진=동해명주)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모든 상품은 스토리텔링이 깃들기를 원한다.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상품은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다. 점점 더 화려해지는 세상에서 이야기는 가장 효과적인 상품의 포장술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업은 상품의 기획단계부터 이름을 포함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에 소비자들이 보탠 ‘왜’와 ‘어떻게’에 대한 사연이 결합하면 스토리의 서사구조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된다.

술도 이야기를 먹고 자란다. 술을 만드는 과정은 과학이지만, 마시는 과정은 인문학이기 때문에 항상 이야기에 노출된다.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들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그렇고, 세금을 피하려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스카치위스키도 마찬가지다.

신대륙에서 천대받으며 만들어지던 버번이 위스키 품평회에서 이름을 날리는 술이 된 경우나, 만국박람회장에서 관객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병을 깨뜨려 향기로 손님을 유인해서 1등 상을 받은 마오타이도 그렇다.

일본의 청주인 사케도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누가 얼마나 많은 쌀을 깎아내느냐(정미 비율)를 두고 경쟁을 벌이면서 주당들의 관심을 끌었을 정도로 술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우리 술도 스토리를 먹고 역사 속에서 성장해왔다. 100년 정도의 암흑기가 있었지만, 역사는 오롯하게 그 모습을 기록해뒀고, 지난 십수년 동안 먼지가 켜켜이 앉은 고조리서 속에서 우리 술을 하나씩 꺼내 복원해왔다. 그 과정에서 역사 속 술 이야기는 우리 술맛을 더욱 풍족하게 만드는 천연의 감미료가 돼줬다.

이화곡(쌀누룩)으로 빚어 만든 이화주는 떠먹는 요구르트와 같은 질감의 술이다. 요즘 사람들에겐 낯설지만, 이 술은 고려 때부터 기록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술이다. 귀족, 특히 여성들이 즐겼다는 이야기는 이 술의 소비패턴을 정해줄 만큼 역사 속에선 유명세를 누린 술이기도 하다.

최남선의 글을 통해 조선 3대 명주로 소개된 ‘죽력고’의 경우는 대나무의 진액(죽력)이 원기회복 등에 효능이 있다는 이야기로 명성을 얻은 술이다.

구한말, 갑오농민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붙잡힌 전봉준 장군이 심한 고문 등으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을 때 이 술 한 모금으로 기력을 찾아 압송됐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술이지만, 남겨진 사진 속 녹두장군의 눈빛은 이 술의 힘을 확인시켜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 담겨있는 술이기도 하다.

서울 성북동의 DOK브루어리는 맥주 양조 기법을 막걸리에 적용해 새로운 트렌드의 술을 만들고 있어 젊은 소비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게다가 술 이름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젊은 감성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두유노’, ‘걍즐겨’, ‘뉴트로’ 순이다. (사진=DOK브루어리)
서울 성북동의 DOK브루어리는 맥주 양조 기법을 막걸리에 적용해 새로운 트렌드의 술을 만들고 있어 젊은 소비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게다가 술 이름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젊은 감성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두유노’, ‘걍즐겨’, ‘뉴트로’ 순이다. (사진=DOK브루어리)

이밖에도 서울의 대표적인 술인 삼해주와 약산춘을 비롯한 전국의 명주들은 모두 그 술이 만들어진 마을 혹은 집안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고조리서에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감정기를 태어난 술들은 양조장의 역사나 브랜드의 힘으로 버텨오면서 오늘도 소비되고 있고, 새롭게 출시되는 술들도 제각각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지역의 설화를 담아낸 이름이나, 레트로 감성에 주목하거나, 젊은 층의 생각을 담아낸 술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포항의 동해명주에서 최근 출시한 무감미료 막걸리 브랜드다. 설화의 발상지라는 점을 살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술 이름으로 채택한 것이다.

지역에서 생산한 쌀로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주당들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드라이한 맛을 낸 것이 이 술의 특징이다. ‘연오랑’은 알코올 도수 12도이며 ‘세오녀’는 6도의 술이다. 두 술을 브랜딩해서 9도로 음용하면 더욱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양민호 대표의 귀띔이다.

복고풍의 드라마는 물론 가요경연까지 등장할 정도로 레트로 트렌드는 강세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술 이름이 최근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창녕에 있는 우포의 아침 양조장이 연전에 출시한 청주 ‘조선주조사’. 1930년대에 출간된 일제강점기의 양조역사가 담겨있는 책 이름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출간된 책이지만, 주세법상 청주의 역사가 그 시절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여름을 넘기는 술이라는 뜻의 우리 고유의 술인 과하주(過夏酒)를 시그니처 술로 생산하고 있는 술아원에서 올 초 발표한 술 이름은 ‘경성과하주’다.

막걸리 발효 과정에 증류소주를 넣어 발효를 멈추는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이 술은 증류주의 쨍한 술맛과 발효가 되지 않고 남은 곡물의 단맛이 일품인 술이다. 전래 돼온 주조법을 채택하면서 최남선이 남긴 <조선상식문답>에 등장하는 ‘경성과하주’를 술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술의 주재료를 그대로 이름으로 반영한 술들도 최근 잇따르고 있다. 우리술품평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바 있는 경기도 용인의 술샘에서 최근 발효한 ‘아임프리’는 글루텐프리 막걸리이다.

밀누룩이나 별도의 효소제 없이 100% 쌀로만 빚어 글루텐 과민증이 있는 사람들도 마실 수 있도록 기획된 술이다. 또한, 전북 완주의 해야 양조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막걸리 ‘찹쌀로만’은 아예 주재료를 전면에 내세운 술이다. 찹쌀로 빚은 술은 대체로 단맛을 많이 가진다.

이밖에도 젊은 감성을 반영하면서 젊은 계층에게 이름을 알리고 있는 서울 성북동의 디오케이양조장은 ‘걍즐겨’와 ‘뉴트로’에 이어 ‘두유노’라는 술을 출시했는데 모두 파격적인 이미지를 담아내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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