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2 09:55 (목)
‘술잔이 술잔 같지 않으면, 술잔이겠는가’
‘술잔이 술잔 같지 않으면, 술잔이겠는가’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4.27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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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논어에서 ‘인정욕구’ 극복하라 여러 차례 인용
팬데믹 상황에선 타자 향한 시선 자신으로 돌려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감출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중 하나다. 투여한 시간과 정성을 자신이 원하는 결과로 맞이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정욕구는 사회적 인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인정욕구는 더욱 현실적인 삶의 태도가 된다. 

우리는 최근 치러진 선거에서 인정욕구를 향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목격했다. 각종 말실수와 망언 등으로 신망을 잃은 정치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유권자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말과 정책을 꺼내놓았다.

국회의원이라는 권력을 받아내기 위해 유권자로부터 인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했을 뿐, 유권자들이 귀 기울일 근거는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그들에겐 비극으로 끝났다. 막말과 무책임한 언행이 상식에 밀린 것이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은 화자의 말투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감성에 깊숙이 다가온 느낌은 그것을 능가할 다른 감정이 생기기 전까지 철옹성처럼 유지된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호소하더라도, 그리고 청자가 이성을 근간으로 사고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호불호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결과를 이번 선거를 통해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공자의 <논어> 중에 ‘고불고, 고재 고재(觚不觚 觚哉觚哉)’라는 구절이 있다. 〈옹야〉편에 등장하는 글이다. 여기서 ‘고(觚)’는 술잔을 말한다. 각종 제례의식에서 사용하는 고는 사각 혹은 팔각으로 각이 잡힌 잔이다. 구절 풀이를 하면 “술잔이 술잔 같지 않으면, 술잔이겠는가. 술잔이겠는가” 정도. 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풀이는 주자의 해석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는 각이 져 있다. 그런데 모서리들이 무뎌진 술잔을 상상해보자. 이런 모습의 고를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술잔의 기능은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제례에 쓰는 술잔의 쓰임새는 더는 없는 것이다.
공자가 이런 모습에 빗대 어떤 대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고 주자는 풀이하고 있다. 즉 임금이든 신하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유명무실한 존재인 상황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현대의 중국 학자들은 주자와 다른 풀이를 내놓고 있다. 리쩌하우의 경우는 <논어금독>에서 세상을 한탄하는 문학적 표현 정도로 이 글귀를 해석한다. 또 리링이라는 학자는 <집 잃은 개>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꺼내놓는다.

문장이 기이하고 어렵다면서, 술잔 고(觚)가 팔 고(沽)자를 대신해 빌려 쓴 글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고재, 고재’는 “팔아야지, 팔아야지”라는 뜻이며, 적당한 가격을 기다려 매매를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풀이한다.

즉 공자 스스로 자신의 유세를 받아들일 제후에게 적절하게 영입되길 바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주자가 만약 이 해석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찌 됐든 이 구절은 ‘인정욕구’로 리링은 풀이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논어>에는 인정욕구와 관련, 다양한 인용이 등장한다. 그 중심은 인정욕구가 충족되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아야 군자라는 것. 〈학이〉, 〈이인〉, 〈헌문〉편에서 공자는 당대 지식인들이 권력에 인정받으려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특히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기보단 알아줄 만하게 실력을 갖추라고 했으며, 남에게 인정받기보단 자신을 갈고닦는데 힘쓰는 모습을 보이라고 말한다. 즉 시선의 방향을 외부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리라는 주문이다.

그런 시선이 선행되지 않으면 타자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함몰된 행동과 말만 꺼내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두려움과 공포, 팬덤과 패닉은 그 기준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출현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들여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 자체를 탓할 수 없지만, 이런 시기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팬데믹으로 인해 예측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에선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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