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21년차 홍정의 대표, 유기농에 3년 숙성까지
술에 자존감 듬뿍 담아 생산, 다래와인도 시범양조

가나다
귀농 21년차 농부 홍정의 대표는 경기도 연천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캠벨 얼리 품종으로 와인을 빚고 있다. 사진은 양조장의 발효실에서 자신의 와인을 설명하는 홍 대표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유기농 농부의 길을 걷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생산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게 꼭 도시만의 일이 아니다 보니 더 그렇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아 피가 벼를 이겨 먹듯 피어오르면 나이 지긋한 동네 촌부들은 한결같이 그 논 주인의 게으름을 혀를 차면서 타박한다. 유기농을 위해 농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순간 당사자는 게으른 농부라고 커밍아웃하는 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친환경과 유기농은 한때 농촌에서 왕따를 당하기 쉬웠던 금기어 같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요즘이야 친환경과 유기농이 일상처럼 다가오지만 말이다.

한탄강과 임진강을 끼고 있어 수량이 풍부해서 옆 동네 철원만큼 쌀이 좋기로 유명한 경기도 연천. 이곳에 귀농 21년 차의 게으른 농부(?)가 포도의 북방한계선을 유지하듯 고집스럽게 유기농 재배를 하는 곳이 있다.

자신이 농사지은 포도로 건강한 내츄럴 와인을 만들어 3년은 숙성시켜야 제맛을 낸다며 시간에 기꺼이 술을 맡기는 양조인, 홍정의 대표의 농업회사 예진이 바로 그곳이다.

홍 대표가 처음 귀농한 지난 1998년, 연천에는 큰 홍수가 났다. 이 홍수로 인해 당시 홍 대표의 부모님이 지은 참외 농사가 모두 망가지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홍 대표는 이곳에 포도나무를 심는다. 참외 농사가 장마철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대형 서점을 찾아 혼자 공부해가면서 포도를 키워가며 한발 한발 농부가 되어갔다. 팔다 남은 포도로 예전 방식의 포도주를 만들면서 양조의 길에도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 술은 종교적인 예식에도 사용할 수 없는, 그래서 상업적인 가능성이 없는 술이었다.

그러다 2002년경 가톨릭 성직자로부터 친환경 농법을 전해 듣게 되고, 그 길로 유기농으로 과수농사 방법을 전환하게 된다. 또 제대로 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효모로 발효시키는 양조방법을 독학으로 배우게 된다.

이렇게 술과 인연을 맺은 지 햇수로 10년. 늦게 배운 술 공부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홍 대표는 국세청 주류지원센터를 찾아 캠벨 얼리 품종으로 완전 발효시킨 드라이한 맛의 포도주를 자신의 술로 만들어내게 된다.

늦깎이로 술 공부에 들어간 홍정의 대표는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양조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은 자신이 증류한 브랜디를 설명하는 홍 대표
늦깎이로 술 공부에 들어간 홍정의 대표는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양조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은 자신이 증류한 브랜디를 설명하는 홍 대표

그렇게 시작한 와인공부가 박사과정으로까지 이어져 지금도 연천에서 강남에 있는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까지 수업을 들으러 가고 있다고 한다. 발효에 관한 공부다 보니 화학은 물론 발효학 전반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홍 대표가 본격 상업양조에 나선 것은 지난 2018년. 주류제조면허를 취득하고 오크통에서 3년 숙성한 자신의 포도주를 ‘지니 루즈’라는 이름으로 출시한다. ‘지니’는 자신의 딸 이름에서, 그리고 붉은색을 뜻하는 루즈라는 단어와 합친 것이다. 그리고 술병의 라벨에는 멸종위기종인 붉은 꼬리 여우를 넣었다. 환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철학을 디자인에도 반영한 것이다.

이때 함께 출시한 술이 이탈리아의 ‘그라파’와 같은 브랜디였다. ‘디엠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술은 화이트 그라파. 즉 오크 숙성을 시키지 않고, 스테인리스스틸 발효조에서 3년을 숙성시킨 술이다. 이 술 또한 북위 38도에 인접해 비무장지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연천의 지리적 특징과 딸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그런데 홍 대표는 올해부터 새로운 상품으로 제품을 다시 기획하고 있다. 분단을 상징하는 북위 38도선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증류주인 디엠진을 ‘N38(뉴38)’ 시리즈로 바꾸고 알코올 도수 28도와 38도, 48도 3종 세트로 전환했다.

또 자신의 포도주처럼 오크통에서 3년 숙성시킨 브랜디도 신상품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여기에 새로운 상품을 하나 더 보태기 위해 연천의 특산품 중 하나인 다래로 모스카토 같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시범 양조를 하고 있다.

양조장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새로운 술의 등장이다. 예진도 그런 술도가가 속할 준비가 돼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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