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학자 마이클 셔머, 포스트 코로나 시대 밝게 전망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해결방식이 평등한 사회 구축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우원> “역사는 그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퇴행을 마련해 놓는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말이다.

이 문장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퇴행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수없이 목격한다. 그런 까닭에 퇴행을 마주하면 진보를 향한 인류의 몸짓이 저지당했다는 생각에 일종의 낭패감에 젖곤 한다.

올해가 그런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도 전 세계인이 그럴 것이다. 온통 코로나19라는 단어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세상.

종일 쏟아지는 뉴스를 전달하는 TV의 뉴스 이름은 으레 ‘코로나19’가 접두사로 붙어 있고, 그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포털에 들어가는 첫 화면에도 확진자 현황은 습관적으로 배치돼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절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더욱 이상한 시대다. 그러니 당연히도 팬데믹이 우리를 조건 짓고 결론까지 내려는 현재 상황을 퇴행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진화학자 마이클 셔머는 최근 기고(아메리카 스칼라지)를 통해 코로나19의 위기 속에서도 인류는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도덕의 궤적》에서 말하고 있는 논리의 팬데믹 버전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도덕의 궤적》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전반에 걸쳐 인류가 어떻게 진보를 이뤄왔는가를 말하는 책이다. 그의 답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인류가 얻어낸 대부분의 긍정적 변화는 폭력혁명이나 파괴적인 결별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에 기반해 점진적인 변화를 일궈내면서 이뤄냈다는 것.

즉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문제 해결방식이 더 안전하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뇌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독 감정적인 사건들, 단기적인 추세, 개인적인 일화 등을 알아차리고 기억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고 말한다.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며 단기적이라는 말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심리적으로 ‘현재’를 느끼는 3초간의 시간에서부터 한 평생이라 할 수 있는 수십 년 정도까지를 받아들인다고 한다.

마이클 셔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진화라던지 기후변화, 도덕적 진보처럼 수백만 년의 시간부터 적게는 수천 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생애에선 결코 관찰할 수 없는 시간이 소요되는 개념들의 장기적인 추세를 추적하기엔 인간의 시간 감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츠바이크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말한 퇴행은 “폭풍우에 가장 튼튼한 댐과 지붕이 무너지듯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권리의 담도 무너져 내린다”는 다음 문장처럼 우리의 시간 감각에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셔머는 진화론적 시각에서 인류의 진보의 역사를 읽어내듯 코로나19에 힘들어하는 팬데믹의 상황도 진보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언택트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시스템 자체가 새로운 기준에 맞춰 변화할 것이며 교육도 비대면 교육이 일상화되고, 정치 행위도 원격 회의 등을 도입하면 굳이 의회에 모여서 비용을 지불하기보다 지역에서 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본다.

또 투표시스템이 금융 시스템만큼만 튼튼하게 만들어진다면 전자투표를 못 할 이유가 없다며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한다.

물론 마이클 셔머의 분석은 본인 스스로 지적했듯 난관론에 근거한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역사를 지침 삼아 분석한 그의 글이 담고 있는 함의는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펜데믹에 낯설어하기보단 그 속에서 긍정의 가치를 찾아낼 때다. 그래서 더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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