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뱅커 접고, 양조 인생 걷는 조동일 대표
수출에 초점 둬 외산 프리미엄 진과 경쟁할 생각

런던과 싱가포르에서 뱅커 생활을 한 조동일 부자진 대표는 노간주열매와 허브로 만들어지는 진에 빠져, 결국 양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은 16가지의 재료로 만들어지는 조 대표의 부자진이다.
런던과 싱가포르에서 뱅커 생활을 한 조동일 부자진 대표는 노간주열매와 허브로 만들어지는 진에 빠져, 결국 양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은 15가지의 재료로 만들어지는 조 대표의 부자진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통해 유명해진 술이 있다. 칵테일 ‘마티니’다. 이 술은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를 넣어 증류한 스피릿인 ‘진’에 와인으로 만든 혼성주 ‘베르무트’를 섞어 마시는 술이다.

그런데 제임스 본드의 영화 속 대사 이후 마티니의 기주(중심 술)가 하나 더 늘었다.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상남자의 술처럼 이미지가 굳혀진 ‘마티니’는 그렇다면 제임스 본드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자신이 싫어하는, 변태 같은 인물 루쓰를 설명하면서 마티니를 언급한다.

그는 바에서 마티니를 “훨씬 드라이하게(달지 않게) 해오고, 올리브는 넣지 말라”는 식으로 거칠게 주문하는데, 이 모습이 홀든의 눈에는 속물처럼 보였다고 한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불만의 계절>에도 마티는 상남자의 맛으로 그려진다. “작은 유리잔이 아니라 수박처럼 큰 잔에 레몬 껍질을 감아 놓았다.

처음 한 모금 마셨을 때는 흡혈 박쥐에게 물린 듯 알알하고 마취가 된 듯 약간 멍했다”는 표현에서 충분히 그 술맛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가 극에 달한 것은 영화 〈킹스맨〉에서다. 〈007〉의 제임스 본드를 견제하듯 주인공 애그시는 “진 베이스로, 흔들지 말고 저어서, 베르무트는 넣지 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라고 바텐더에게 말한다.

주문한 내용은 까다로워 보이지만, 한 마디로 진 한 잔을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문법이 단지 남자들의 마초적 본능 탓일까? 답은 ‘아니다’다.

마티니의 주재료인 1980년대 이후 진의 고급화가 이뤄져 정성 들여 증류한 진이 급증한 것이 영화에서도 반영됐을 뿐이다.
 

아버지의 허브와 아들의 양조기술이 만나서 빚어진 서양술 ‘진’이 등장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하늘 꽃 이야기 농장’의 조부인 대표(사진 오른쪽)와 부자진의 조동일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 재료로 만든 진의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지 관심이 모아진다.
아버지의 허브와 아들의 양조기술이 만나서 빚어진 서양술 ‘진’이 등장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하늘 꽃 이야기 농장’의 조부연 대표(사진 오른쪽)와 부자진의 조동일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 재료로 만든 진의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지 관심이 모아진다.

그런데 이 술이 이 땅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런던과 싱가포르 등에서 ‘뱅커’ 생활을 한 양조인의 손에서 말이다.

지난 2016년 귀국해 경기도 양평에 증류소를 만들고 줄곧 진을 연구한 조동일 대표(39)가 그 술의 주인공이다.

그가 만든 술은 20여년 전 귀촌해서 허브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허브와 자신의 증류 기술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름도 ‘부자 진’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올 초 발표된 그의 첫술은 노간주 열매 이외에 15종의 허브가 들어간다.

원주는 양평과 인근 쌀로 발효주를 만들고 이 술에 각종 허브를 넣어 증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술을 쌀증류주를 베이스로 만드는 세계 최초의 상업 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유럽과 북미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대중적인 술이지만 소주와 막걸리, 맥주를 중심으로 술의 세계를 상상하는 이 땅의 애주가들에겐 낯설기 그지없는 이 술에 그는 왜 천착한 것일까.

그 까닭을 물으니 조 대표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수출할 목적으로 빚었습니다. 그래서 라벨도 영문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해외 수출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조 대표의 부자 진은 수출을 염두에 둔 만큼 요즘 유럽과 북미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핸드릭스 진’과 ‘몽키47 진’을 염두에 두고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 술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술이라는 평가를 듣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런데 잘나가던 뱅커의 길을 접고 거친 가시밭길 같은 양조인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보통 사람들에겐 어려운 일이니 더욱 궁금해졌다. 그 답도 명쾌했다.

진이 좋아서 외국 생활을 할 때 진을 수집하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프리미엄 진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봄베이 등의 진은 향이 강해 프리미엄 진입이 힘들지만,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의 진들은 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대접을 받고 있는데, 충분히 그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이다.

여기에 화장품 회상에 허브를 납품하는 아버지가 있어서 더욱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 대표의 진은 은은한 향수처럼 다가왔다. 알코올 도수는 44%지만, 목넘김은 부드럽다. 머리에 각인된 ‘런던드라이진’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그는 현재 3번째 배치까지 술을 생산한 상태란다. 각각의 배치 별로 들어가는 허브의 종류를 달리해 밀레니얼 감성에 최대한 접근한 술을 만들겠다고 한다.

또 한 번 젊은 양조인들의 시도가 남다르고 느끼면서, 그의 부자 진 세 종류를 모두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