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진보가 만들어낸 양극단의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
미래학자 엔리케즈 TED 강연에서 ‘겸허와 관용’ 강조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휴대전화를 이용해 인터넷뱅킹 업무를 처리한 지 햇수로 22년이 되었다. 1999년의 일이다.

헤프닝으로 끝난 Y2K 문제가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던 그 시절, 한편에서는 오늘날의 모바일뱅킹의 원형이 만들어져 은행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보면 고작 입출금 정도만 할 수 있는 서비스였는데도 얼리어답터들은 인터넷뱅킹 서비스에 환호했고 기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은행 창구를 찾아가 거래했다.

그 덕에 지금은 점포와 자동화기기가 줄고 있지만, 당시는 여전히 점포와 자동화기기를 늘리면서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얼굴을 맞대야 가능한 통장의 개설 및 신규 예금 가입도 모바일 환경에서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플랫폼을 갖지 못한 은행들의 고민은 깊어가고 플랫폼을 지닌 빅테크들은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이렇게 기술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권력으로 등극했고, 그 권력의 크기와 깊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고 있다.

기술문명에 대한 철학적 숙고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만큼 많이 고민한 철학자는 없을 듯싶다.

하이데거 기술철학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저작 《기술과 전향》에는 라인강의 수력발전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강의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수력발전소와는 달랐다는 하이데거는 수력발전소의 등장으로 강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바뀌게 됐다고 말한다.

농업용수 및 생활용수의 공급원 혹은 강의 양안을 가르는 방해물이었던 강이 수력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에너지의 원천으로 신분을 달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대기술이 출현한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게 인간을 위한 에너지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다시 앞서 들었던 휴대전화를 이용한 인터넷뱅킹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단순히 입출금업무를 처리하던 휴대전화와 웬만한 은행업무는 물론 동영상 및 음악 감상 등 거의 모든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휴대전화는 상전벽해를 해도 몇 번을 해야 손에 들어올 만한 기술과 기계의 총합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휴대전화 없는 세상을 지금은 더욱 꿈꿀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강화된 물신성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기술이 우리들의 윤리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된 윤리 수용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올라온 테드(TED) 강연에서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즈<사진>는 윤리를 지배하는 기술 중심의 사회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그는 강연에서 동성결혼 및 전쟁에서의 기관총,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의 먹는 대체육 등 다양한 사례를 거론한다.

동성결혼을 25년 전쯤에는 미국인의 2/3가 반대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2/3가 찬성한다고 한다.

미디어의 발전,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전으로 진보적 아젠다들이 보다 빠르게 확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1차대전의 기관총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았고, 대체육 한 덩어리의 가격이 드라마틱하게 떨어져 지금은 누구나 저렴하게 살 수 있어 더 많은 사람이 채식주의자의 길을 나서고 있다는 것이 엔리케즈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런 만큼 가치를 두고 더 많은 사람이 갈등을 겪게 된다고 본 강연자는 관용과 겸허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고 있는 흑인차별과 총격사건 등으로 미국 도시의 교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구호가 두 개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경찰을 지지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여론조사에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며(67%), ‘경찰 또한 지지한다’(58%)고 응답한다고 한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양극화의 경향은 더 강화될 것이다. 그래서 엔리케즈는 서로의 윤리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과 겸허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은 사회를 살고 있다. 우리도 기술윤리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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