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갑곶리·사기리’에 천연기념물 두 그루, 북방한계선 역할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도 400년 된 나무 우물 옆에 정원수로 식재

강화도는 서울로 들어오는 물길을 막고 있는 경계병 같은 존재다. 그런 까닭에 고려와 조선은 외적이 침입하면 강화도에서 항쟁하며 싸워왔다. 탱자나무는 촘촘하게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방어를 목적으로 성벽밖에 심었던 나무이기도 하다. 민간에서는 울타리로, 군사적으로는 방어용 목책으로 썼던 것이다. 사진은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
강화도는 서울로 들어오는 물길을 막고 있는 경계병 같은 존재다. 그런 까닭에 고려와 조선은 외적이 침입하면 강화도에서 항쟁하며 싸워왔다. 탱자나무는 촘촘하게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방어를 목적으로 성벽밖에 심었던 나무이기도 하다. 민간에서는 울타리로, 군사적으로는 방어용 목책으로 썼던 것이다. 사진은 강화도 사기리 탱자나무.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여름꽃은 이파리를 태울 듯 덤벼드는 태양을 이겨 먹으려고 피어난다.

절절 끓는 햇빛이 꽃살을 새까맣게 태울 기세로 덤벼들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주황(능소화)과 진홍(배롱나무)의 빛깔을 한껏 자랑한다.

정수리로 내려꽂히는 햇빛에 곤죽이 될까 두려워 그늘만을 찾는 그 뜨거운 여름날에도 여름꽃은 그렇게 자존심을 꺾지 않고 파란 하늘빛만큼이나 또렷하게 색깔을 드러낸다.

봄꽃처럼 가볍지 않으며 가을꽃처럼 산들거리지 않는 여름꽃은 마음껏 멋 부리는 도시의 처녀처럼 초록에 속살을 드러내듯 피어있다.

하지만 바람과 땅이 거둬가는 봄꽃처럼 여름꽃도 태양의 끈질긴 공세에 지쳐 쓰러지고, 그 자리엔 내년을 기다리는 씨앗이 깃든다.

한반도 전체가 염천으로 끓는 7월 하순의 어느 날, 강화도의 바다도 아침 햇빛에 데워지고 있었다.

바람도 일지 않는 그런 날에 탱자나무를 만나러 나서는 길이었다. 여름의 탱자는 청귤처럼 진녹색을 띠고 익어간다. 이파리와 열매에 날카로운 가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강화도에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강화대교 건너편 갑곶리 갑곶돈대 안에 한 그루의 탱자나무(제78호)가 있고, 강화도 남쪽 초지대교를 건너 전등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사기리 탱자나무(제79호)를 만나게 된다.

두 나무 모두 수령 400년을 넘어섰다. 나무의 높이는 고작 4m, 둘레는 1.2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키 낮은 관목이어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크고 웅장한 수형을 만들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강화도의 탱자나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받는다. 하나는 호국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흔히 탱자나무는 집안의 울타리, 혹은 과수원과 시골 초등학교의 담장을 대신하는 울타리로 심어졌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가지가 서로 움켜 붙듯 자라 자연스레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과 액운을 막는 의미도 같이 담겨 있는 탱자나무는 같은 이치에서 성벽 밖에 심어져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한강과 서울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막고 서 있는 경계병과 같은 까닭에 섬에는 고려 때부터 크고 작은 성과 진지가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따라서 해안을 따라 들어오는 외적을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 탱자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나무가 갑곳리와 사기리의 탱자나무다.

또 하나의 의미는 탱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이 강화도라는 점이다. 즉 강화도보다 위도가 높은 곳에선 탱자나무가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역사성과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강화도에 있는 400년 수령의 두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듯하다.

의미는 다르지만, 중국의 《춘추좌씨전》에는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가 전해져 온다.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는데 초나라 왕이 안영의 기를 죽이려고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앞에 두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라고 말을 건넨다.

이에 지지 않고 안영은 “귤나무가 회수의 남쪽에선 귤을 맺지만, 회수의 북쪽에선 탱자가 열린다”는 말로 맞대응한다.

지금도 환경에 따라 사람도 사물도 변할 수 있음을 빗대어 이르는 ‘귤화위지’의 기원이 이 고사에서 비롯됐다.

400년 된 탱자나무가 한그루 더 있다. 경상북도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 심어진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는 집안을 감싸고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종택 안 우물 옆에 심어진 정원수다.

많지 않은 경우지만 정원수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장수황씨 종택은 명재상 황희 정승의 7대손(황시간)이 문경에 자리를 잡으면서 만든 집이다.

159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집을 지으면서 탱자나무도 안에 심은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한 나무처럼 보이도록 성장했다.

서로 견제하지 않고 각자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마치 하나의 몸처럼 보이게 성장한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에 가면 또 400년 가까이 된 탱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석성 동헌 앞에 심어진 나무로 부여군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다. 나무는 5m 정도로 다른 탱자나무에 비해 키가 조금은 큰 편이다.

경상북도 문경 장수황씨 종택 마당에는 정원수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다. 400년을 넘긴 흔치 않는 나무다. 이처럼 집안에 탱자나무가 있는 경우는 액운과 귀신을 막는다는 상징을 이 나무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문경 장수황씨 종택 마당에는 정원수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다. 400년을 넘긴 흔치 않는 나무다. 이처럼 집안에 탱자나무가 있는 경우는 액운과 귀신을 막는다는 상징을 이 나무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탱자가 노랗게 익는 가을쯤에는 강화도나 문경, 혹은 부여를 찾아보자.

약용으로 쓰이는 탱자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성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심어진, 혹은 귀신과 액운으로부터 집안을 보호하려는 탱자나무를 만나는 것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해주지 않을까 싶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여름꽃은 이파리를 태울 듯 덤벼드는 태양을 이겨 먹으려고 피어난다.

절절 끓는 햇빛이 꽃살을 새까맣게 태울 기세로 덤벼들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주황(능소화)과 진홍(배롱나무)의 빛깔을 한껏 자랑한다.

정수리로 내려꽂히는 햇빛에 곤죽이 될까 두려워 그늘만을 찾는 그 뜨거운 여름날에도 여름꽃은 그렇게 자존심을 꺾지 않고 파란 하늘빛만큼이나 또렷하게 색깔을 드러낸다.

봄꽃처럼 가볍지 않으며 가을꽃처럼 산들거리지 않는 여름꽃은 마음껏 멋 부리는 도시의 처녀처럼 초록에 속살을 드러내듯 피어있다.

하지만 바람과 땅이 거둬가는 봄꽃처럼 여름꽃도 태양의 끈질긴 공세에 지쳐 쓰러지고, 그 자리엔 내년을 기다리는 씨앗이 깃든다.

한반도 전체가 염천으로 끓는 7월 하순의 어느 날, 강화도의 바다도 아침 햇빛에 데워지고 있었다.

바람도 일지 않는 그런 날에 탱자나무를 만나러 나서는 길이었다. 여름의 탱자는 청귤처럼 진녹색을 띠고 익어간다. 이파리와 열매에 날카로운 가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강화도에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강화대교 건너편 갑곶리 갑곶돈대 안에 한 그루의 탱자나무(제78호)가 있고, 강화도 남쪽 초지대교를 건너 전등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사기리 탱자나무(제79호)를 만나게 된다.

두 나무 모두 수령 400년을 넘어섰다. 나무의 높이는 고작 4m, 둘레는 1.2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키 낮은 관목이어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크고 웅장한 수형을 만들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강화도의 탱자나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받는다. 하나는 호국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흔히 탱자나무는 집안의 울타리, 혹은 과수원과 시골 초등학교의 담장을 대신하는 울타리로 심어졌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가지가 서로 움켜 붙듯 자라 자연스레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과 액운을 막는 의미도 같이 담겨 있는 탱자나무는 같은 이치에서 성벽 밖에 심어져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한강과 서울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막고 서 있는 경계병과 같은 까닭에 섬에는 고려 때부터 크고 작은 성과 진지가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따라서 해안을 따라 들어오는 외적을 일차적으로 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 탱자나무를 선택한 것이다. 그 상징적인 나무가 갑곳리와 사기리의 탱자나무다.

또 하나의 의미는 탱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이 강화도라는 점이다. 즉 강화도보다 위도가 높은 곳에선 탱자나무가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역사성과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강화도에 있는 400년 수령의 두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듯하다.

의미는 다르지만, 중국의 《춘추좌씨전》에는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가 전해져 온다.

제나라의 재상 안영이 초나라의 왕을 만나러 갔는데 초나라 왕이 안영의 기를 죽이려고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앞에 두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라고 말을 건넨다.

이에 지지 않고 안영은 “귤나무가 회수의 남쪽에선 귤을 맺지만, 회수의 북쪽에선 탱자가 열린다”는 말로 맞대응한다.

지금도 환경에 따라 사람도 사물도 변할 수 있음을 빗대어 이르는 ‘귤화위지’의 기원이 이 고사에서 비롯됐다.

400년 된 탱자나무가 한그루 더 있다. 경상북도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 심어진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는 집안을 감싸고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종택 안 우물 옆에 심어진 정원수다.

많지 않은 경우지만 정원수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장수황씨 종택은 명재상 황희 정승의 7대손(황시간)이 문경에 자리를 잡으면서 만든 집이다.

159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집을 지으면서 탱자나무도 안에 심은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한 나무처럼 보이도록 성장했다.

서로 견제하지 않고 각자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마치 하나의 몸처럼 보이게 성장한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에 가면 또 400년 가까이 된 탱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석성 동헌 앞에 심어진 나무로 부여군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다. 나무는 5m 정도로 다른 탱자나무에 비해 키가 조금은 큰 편이다.

탱자가 노랗게 익는 가을쯤에는 강화도나 문경, 혹은 부여를 찾아보자.

약용으로 쓰이는 탱자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성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심어진, 혹은 귀신과 액운으로부터 집안을 보호하려는 탱자나무를 만나는 것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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