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30 10:06 (금)
[칼럼]따를 것인가, 아니면 따르게 할 것인가
[칼럼]따를 것인가, 아니면 따르게 할 것인가
  • 김승호 편집위원
  • 승인 2015.04.12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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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2>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지 20년이 되어간다.

당시 눈물로 은행과 금융회사를 떠나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우리는 IMF자금을 차입하는 조건으로 IMF가 제시한 각종 기준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서, 아니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20년 쯤 흘렀다. 현재 우리 금융권은 어떠한가?

여전하다. 바젤위원회의 각종 리스크 관련 기준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제도와 관리 툴까지 가져다 쓰고 있다. 선진 10개국의 중앙은행들이 만든 기준을 말이다.

우리 몸에 그 옷이 맞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옷이 안 맞으면 옷에 몸을 맞춰 입어야 할 뿐,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감이 부쩍 늘고 있는 현재의 금융권은 아마도 하반기부터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와 친숙한 일정을 보내게 될는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은행은 초저금리 시대에도 생존할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기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며, 증권사 및 보험사 등 2금융권도 경기 위축에 따른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제조업에서는 세계 1위 종목이 다수 등장했다. 그래서 우리 기업 내지 제품이 세계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금융권은 20년의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이같은 상황을 반영한 탓인지는 몰라도, 최근 인문학 트렌드에는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단순하게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정도의 학문으로 알고 있던 인문학이 더 이상 대학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삶의 기준’과 ‘생과 사의 경계’를 말하고 있다.

타자를 이해하거나 다친 마음을 추스르는 힐링의 범위를 벗어나서 적극적인 인문학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문학의 역할이 이것이었단다.

《인문학의 미래》라는 책으로 유명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을 인류의 역사와 업적을 습득하고 지금과 다른 대안에 대한 관심을 갖는 한편 비전을 얻고 비판정신을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현재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비판적 관점에서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대 홍성욱 교수는 “인문학은 텍스트를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읽는 것이고, 같은 텍스트를 읽은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을’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위기국면이나 지배적 관점의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이를 풀기 위한 해법을 찾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니체는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개혁 개방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그동안 도광양회의 길을 걸었던 중국이, 달러화가 차고 넘쳐도 주도권을 쥐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던 중국이 기축통화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이야기다.

그 덕에 우리는 미국 주도하에 일부 유럽국가가 참여해 만들어낸 국제금융질서에 균열이 가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목도하게 되었다.

남이 만든 기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데 익숙했던 우리에게 어느 순간 선택이 강요될 것이다. 기준에 대한 선택 말이다.

익숙한 것을 털어내고 낯섦과 만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지난 회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에 선택에 대한 강요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느 쪽을 선택해서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따르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조선의 왕 중 우리의 기준을 만들면서 중국과의 외교마찰, 그리고 국내 사대부와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왕이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세종이 그이다.

중국의 음악인 ‘아악’을 정비하면서 통일신라 이래로 우리 민족이 즐겨 들어왔던 ‘향악’도 함께 궁중제례악으로 사용케 했고, 우리 기준에 맞는 역법을 계산하게 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문자 〈한글〉까지 창제한 세종. 그가 왜 우리의 기준을 만들려 했는지 인문학적 성찰을 해야 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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