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인란<4>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지금 인터넷으로 ‘인문학’이라고 검색하면 다양한 타이틀의 인문학 강좌와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은 중앙부처, 지방자치체, 대학, 방송사 등에서 주관하는 것들이다.

〈길 위의 인문학〉, 〈시민과 함께 하는 인문학〉, 〈인문학 정원〉, 〈인문학특강〉, 〈생각의 집〉….

한 학기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최고경영자과정에서부터 돈 안들이고 들을 수 있는 골목 도서관 강연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강좌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다양하다.

골목길이 들썩일 정도로 인문학은 이렇게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들어와 있다. 대학의 인문학은 10여 년 전부터 죽어간다고 하는데, 언론을 통해 접하는 인문학은 대한민국 사회가 ‘열공’모드에 들어간 것처럼 광적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우선 사실일까?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도서 구매비는 10년 전부터 줄곧 하락하여 2003년 이래 최저인 1만8154원이었다고 한다. 즉 한 달에 한 두 권의 책을 구매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 통계에는 학생들의 참고서 구매 통계가 포함되어 있으니 일반도서 구매는 한 달에 한 권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게다가 도서정가제 도입 이후 공공도서관의 도서 구매 권수도 줄고 있으니 대한민국 전체로 볼 때 절대 독서량은 줄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광’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단어일까?

대한민국 인문학 열풍은 CEO 등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머지 90%의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기업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C-레벨(경영진)은 경영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인문학적 소양을 가꾸고 있지만 중간관리자 이하에서는 인문학 소양의 개발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해결이 발등의 불이기 때문에 책 한권 제대로 읽을 여유도 없는 것이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관점마저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경영진들은 왜 인문학에 열광하는가. 모든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는 만능키도 아닌데, 금과옥조처럼 성현들의 고전을 받들고, 그들처럼 생각하고 성찰하고 숙고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자동으로 나오는 자판기와 같지는 않지만, 생각하고 숙고하면 그래도 답이 구해지는 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인문학적 사고의 과정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그동안 문명사적 전환 내지 새로운 문명의 등장 등,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여 정리해왔으며, 그 순간에 걸맞은 사고의 틀을 제공해왔고 또 실천의 방법까지 강구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의지해 유지해 오던 경영 분야가 그 한계를 인식하고 인문학적 사고체계를 찾게 된 것이다.

중세 철학의 한계 속에서 지적 탈출구를 찾기 위해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교회의 사제들과 학자들을 초빙하여 동·서교회의 공의회(기독교의 교의를 논의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공적으로 모여 논의하는 회의)를 피렌체에 유치했던 메디치 가문의 혜안이 바로 이 대목을 빛나게 한다.

메디치 가문은 단순히 르네상스를 개척하기 위해 인문학적 투자를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기에는 가톨릭 철학으로는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던 동로마교회 사제와 학자들의 손에 들려온 고대 그리스 문건들은 결국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1985년경 제너럴 모터스의 CEO였던 로저 스미스는 대표적인 인문학 예찬론자이다. 워렌 베니스가 쓴 《리더》라는 책에 그가 1987년에 쓴 《매니저 교육》의 몇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생존 자체의 문제가 되는 경쟁력은 새로운 것을 구상하고 과거를 토대로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조직하거나 어떻게 사태의 추이를 바꿀 수 있을지 상상하는 관리자의 능력에 의존한다.”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비즈니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창의력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즉 로저 스미스의 눈에는 인문학을 학습한 관리자들이 몸에 밴 인문적 능력을 토대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경영의 매 국면마다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으며 회사에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로저 스미스는 “전혀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볼 줄 알고, 이렇게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술과 문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에서 배양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간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문학적 사고가 요즘처럼 특별한 성공법칙이 없는 환경에서 적절한 성공법칙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로저 스미스의 이 같은 생각이 최근 국내 기업의 경영진들에게도 확산되어 현재의 인문학 열풍의 토대가 되고 있다.

하지만 경영진들이 그런 사고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인문학적 경영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선발했다고 해서 기업의 인문적 경영이 달성된 것도 아니다.

경영자에서부터 전 조직원들이 ‘생존’을 위해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면서 숙고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겨우 기초가 달성되었다 할 수 있는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책 몇권 사다가 책꽂이에 장식품처럼 꽂아두었다고, 아니면 TV에서 방영되는 인문학 프로그램 몇 편 보았다고 ‘인문학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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