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적 결합을 위한 하나은행의 선택지는?

관행·집단사고 싫어하는 김병호 행장에 답 있어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김병호 하나은행장은 회의 시간에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하지 않는다.

부하직원의 답변 중에 관행 즉,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라는 답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단사고’에 좌우되는 경영협의회는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회의 시간에 CEO가 감정을 노출하게 되면 회의는 그 순간부터 구성원 중심에서 CEO 중심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당연히 회의의 효율성은 떨어지게 된다. 특히 CEO의 감정뿐만 아니라 의견도 ‘집단사고’의 원인이 된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더라도 답은 이미 제시된 CEO의 의견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관행은 새로운 기준이나 규칙이 들어설 자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어휘이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새로움을 싫어하는 조직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창의성과 효율성을 고려하는 CEO라면 당연히 거리를 둬야 할 대상들이다.

집단사고의 위험성은 굳이 ‘케네디의 피그만 침공’, ‘린든 존슨의 월남전 장기화 결정’ 등의 사례를 들지 않아도 경영학 내지 심리학에서 항시 경고하는 부분이다. 왜 항시 경고하겠는가? 그만큼 없애기 어려운 ‘관행’이기 때문이다.

금융사들의 숙원사업 시작되는 2분기
2분기도 중반에 접어들자 굵직한 금융사들이 각자의 숙원사업에 대한 대책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우리금융은 금산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의 분할매각 방식의 민영화 행보를 하고 있으며 KB국민은행은 전직원 가운데 55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진행한다. 신한은행도 경남기업 수사 때문에 행보를 조금 늦추고 있을 뿐 리딩뱅크를 향한 자행의 속도감 있는 정책을 펼칠 것이다. 아무리 시장 환경이 불투명하더라도 자신들의 노력으로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최대한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은행의 숙원사업은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금융지주에 속한 외환은행과의 통합이다. 연초 김병호 은행장의 취임 이후 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는 물오리의 발짓만큼 바삐 움직일게다.

그런데 김병호 은행장의 취임 일성에 담겨 있던 ‘화학적 통합’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대목이 하나은행의 실질적인 숙제인 셈이다.

IBM을 위기에서 구출한 것은 ‘공감력’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지난 12일자 기사 중에 ‘설득하고 싶다면 그들의 니즈와 욕구를 이야기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하나 실렸다. 《Resonate 공감으로 소통하라》의 저자인 낸시 두아르테가 쓴 짧은 글에서 그녀는 역시 ‘공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고객이든 조직원이든 토론을 통해서 얻고자하는 것이 있다면 일단 그들의 말을 ‘들어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감’ 리더십을 제대로 펼쳐 위기의 IBM을 구한 루 거스너의 사례를 소개한다.

84년부터 연속 3년간 IBM은 시가총액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2위인 엑손모빌과 2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3년차인 86년부터 순익이 급감하면서 IBM은 추락하기 시작한다. 90년대 들어 구원투수로 등장한 CEO가 루 거스너.

당시 그는 관리자들에게 석 달의 시간을 주고 고객들과 만나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가 무엇인지 경청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자신도 매일 고객들과 직접 만났다. 이 과정에서 IBM의 거만했던 민낯이 드러나게 됐고, 그것이 문제를 푸는 고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거스너 회장은 2만명의 직원들이 보는 가운데 임원진과 함께 실시간으로 90분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물론 사전 스크립트는 준비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루 거스너의 말 한 마디. “들었습니다. 결론을 미리 내지 않기 위해 매우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IBM은 내부 사안에 초점을 맞추던 관료적 회사에서 시장을 주도하는 혁신적 회사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몽테뉴와 벤저민 프랭클린의 토론
철학자 몽테뉴는 그의 책 《수상록》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힘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정면으로 직접 질러오는 모든 공격을 달게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다. 논리만 갖춘다면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항시 수용하겠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몽테뉴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한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항시 웃으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로 토론에 임해야 토론이 건강하고 유익하다고 몽테뉴는 말한다.

벤저민 프랭클린도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상대방이 말한 것을 절대 반대하거나 자기의 의견을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일 등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단정을 의미하는 부사, 즉 ‘꼭’이라든지 ‘틀림없이’ 같은 단어들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자신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을 항시 밝혀 회의나 토론을 자신을 중심으로 흐르지 않게 스스로 경계했다고 쓰고 있다.

몽테뉴와 프랭클린의 공통점은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일지라도 열어놓고 토론했다는 점이다. 그래야 ‘집단사고’가 자리하지 못한다. 만약 인위적으로라도 ‘집단사고’를 피하고자 한다면 일부러 반대의견만 제시하는 역할을 한 사람에게 하도록 제도로 만들면 된다. ‘데블스 에드버킷’이 바로 ‘집단사고’의 제도적 방지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화학적 결합을 해야 하는 하나은행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아마도 자신에 대한 비판마저 수용할 수 있는 ‘공감력’이지 않을까 싶다. 이미 김 행장의 모습 속에 답안의 일부가 들어 있다. 그리고 루 거스너의 정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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