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독서, 지도자의 독서<3>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탕평의 군주 영조는 왕자(연잉군) 시절, 스스로 왕을 꿈꾸진 않았을 것이다. 숙종의 장자도 적자도 아닌데다 모계의 신분 또한 궁녀들의 하인이었던 무수리 출신이어서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받쳐 줄 외가의 배경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론이자 권문세가였던 안동 김씨 쪽에서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의 양자로 받아들여 후원을 하고 있었지만 집권세력이었던 소론과 남인의 견제를 효과적으로 돌파할 계책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왕이 될 기회가 주어졌다. 숙종이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자 이윤, 즉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다는 이유로 배다른 아우였던 연잉군이 왕세제에 오르게 된다. 경종의 나이 31세에 왕세제를 두는 보기 드문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집권 소론+남인 세력과 노론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정치는 지금이나 그 때나 매한가지다. 낯 두껍고 속이 검은 후흑(厚黑)의 극한지역인 구중궁궐. 힘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밟히고 너무 익도록 기다리고 있으면 종기마냥 터져 만시지탄하기 십상인 곳이다.

영조가 즉위하던 시절, 그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적장자가 아니라는 신분의 한계에서 비롯된 집권 소론 세력의 냉대, 그리고 자신을 도울 세력의 부족, 게다가 일천한 공부까지 왕권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모자랐다.

◆일천했던 왕세제의 독서
영조는 숙종이 죽기 전까지 약 10년 정도 숙종을 병구완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독서가 남들에 비해 늦어 남들이 《소학》을 읽을 때 《효경》을 읽었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고작 《소학》을 읽었다”는 그의 회고를 보면 당시 그의 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결과, 28세에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그가 읽은 책은 8세에 읽었던 《효경》과 《동몽선습》 《소학》 《대학》 등이 다였다. 나이가 꽉 차 읽기 시작한 《대학》도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학습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다.

오죽하면 왕세제의 서연(書筵)에서 첫 교재로 선정한 책이 《소학》이었으며 이어 《대학》과 《논어》를 읽었다고 하니,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공부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부로 승부건 영조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어 영조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약점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중앙정치는 소론이 장악하고 있었고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부 강경파는 반란까지 일으켰다. 그가 평생 견지한 ‘탕평(蕩平)’은 이러한 상황의 결과였고,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도구는 그의 독서와 공부를 통해 성장한다.

51년 7개월이라는 조선 역대 왕 중 최장의 재위기간 동안 영조는 3458회의 경연을 참석했다. 연평균 경연 횟수로 보면 세종이나 성종, 정조 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이다. 하지만 집권 전반기, 그의 공부는 여느 왕에 뒤처지지 않았고 특히 즉위 초에는 하루에 3번 경연을 열 정도로 제왕 학습에 몰두하였다. 이유는 독서와 공부만이 정치적 반대세력과 싸울 수 있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오늘의 공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다”라는 그의 어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도세자의 공부를 독려하는 과정에서도 영조는 “음식은 한 때의 맛이고 학문은 일생의 맛이다. 배부르면서도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학문뿐이다”라며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결과, 연잉군 시절의 일천했던 공부의 수준은 왕의 공부였던 경연 과정을 거치면서 일취월장하였고, 재위 20년을 넘기면서는 자신의 글을 모은 책인 《어제자성편(御製自省篇)》, 《어제심감(御製心鑑)》 등을 경연 교재로 선정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어제자성편》은 영조 스스로 독서와 생활 속에서 느낀 점을 정리한 책이고 《어제심감》은 마음을 스스로 성찰하는 심학(心學)에 관한 책이다. 경연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을 채택한 것은 학문적으로 관료를 압도하여 정쟁은 물론 자신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려는 정치적 자락을 깐 선택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경종에 대한 독살설을 잠재우기 위해 《예기》〈증자문편〉에 나오는 “임금이 죽고 세자가 탄생하였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형인 경종이 생각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해석되는 영조의 이 행동 역시 지극히 정치적인 연출이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소론과의 권력투쟁, 경종에 대한 독살설, 사도세자와의 지난 갈등, 균역법 도입을 두고 벌인 설전 등 주요 정치적 대목에서 그가 취한 방법은 독서와 독서의 결과물을 이용하여 여론의 방향을 선회시키는 것이었다.

즉 영조에게 독서는 신권을 견제하고 자기 권력의 중심을 잡고 왕조를 존속시킨 정치적 도구이자 매체였던 것이다. 세종이나 성종이 보여준 독서를 통한 권력 강화가 그에게도 유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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