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문혜정 기자> 영국 정부가 지난 4월부터 DC형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할 경우 불이익을 축소하는 등 은퇴자의 퇴직연금 지급방식 선택권을 강화하는 개혁안을 시행했다.

영국은 지금까지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금화를 유도하기 위해 적립금의 75%를 일시금으로 수령할 경우 55%에 해당하는 높은 세율을 부과해 왔다. 실질적으로 종신연금이나 분할인출 상품에 가입하도록 강제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은퇴자의 퇴직연금 지급방식에 대한 자율권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 3월 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의 일시금 수령에 대해 55% 고세율 대신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하면서 일시금 수령에 대한 불이익을 축소했다.

보험연구원 김세중 연구원은 “국내에서 퇴직연금의 연금화를 유도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퇴직연금의 연금화를 강제해왔던 영국이 은퇴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퇴직연금제도를 변경하고 있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제적인 흐름이 퇴직연금의 강제화보다 은퇴자의 선택권 강화로 이어진다면 우리나라도 제도적으로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금화를 강제하자는 주장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할일출 강제해 온 영국, 4월부터 高세율 없애
영국은 지금까지 DC형 퇴직연금 적립금 수령방식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적립금의 75%에 대해 연금 또는 분할인출을 선택하도록 강제해 왔다.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의 25%에 대해서는 비과세 일시금 인출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75%에 대해서는 연금 또는 제한된 분할인출을 통해 노후소득으로 전환해야 하며, 제한된 분할인출의 인출금액은 종신연금 수령액의 120%에 상응하는 금액을 상한선으로 잡았다.

단 연금 적립금이 1만8000파운드 이하인 경우 전액 일시금으로 인출이 가능하며 이 중 25%는 비과세되고 나머지는 소득세율의 적용을 받았다. 일시금 비과세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75%의 적립금에 대해서도 일시금 인출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 55%의 높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시금 인출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또 DC형 퇴직연금 이외에 연 2만파운드의 소득이 확보되는 경우 분할인출액의 규모에 제약을 두지 않았으며 인출액은 소득세율의 적용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제도 변경 결과 55세 이후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25%의 비과세 일시금을 제외하고 연금, 분할인출, 일시금 중 자유롭게 지급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됐으며 일시금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연금 이슈 또는 분할인출과 같이 소득세율이 과세됐다.

따라서 제도 변경 이전에 존재하던 소액 적립금의 전액 일시금 인출허용 제도나 제한된 분할인출 시 인출금액 상한 제도 등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

연금시장 경쟁 통해 사적연금 활성화 기대
영국에서는 은퇴자가 은퇴자산 전액을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 일시금 규모가 크기 때문에 최고소득세율을 적용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세금부담을 낮추기 위해 일시금을 매년 나눠서 인출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보험연구원 김세중 연구원은 “영국의 은퇴자들은 다양한 분할인출 방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종신연금에 대한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최근 저금리 상황에서 종신연금 수익성이 하락한 것도 이 같은 현상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어 “은퇴자들이 적립금 전액을 일시금으로 인출하지 않는다 해도 분할인출 시 인출금액에 대한 제한이 사라짐으로써 다양한 인출방법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전통적인 종신연금 수요가 분할인출 수요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실제 변경된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된 이후인 지난 4월 23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는 종신연금 수익률이 사상 최저치로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종신연금 수익률은 기대수명 증가와 시중금리 하락이 겹치면서 수년간 하락해왔다.

연금 수익률 하락과 퇴직연금제도 개선안 발표로 2014년 4분기 종신연금 판매도 50% 이상 감소한 반면 분할인출은 두배 가까이 판매가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영국의회의 제도 개선은 은퇴자의 노후소득보장이 약화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 근로자들의 은퇴저축을 장려하고 사적연금 시장을 효율화하기 위한 제도로 보고 있다.

이번 연금개혁을 통해 많은 은퇴자가 적립금을 일시금으로 인출하면서 DC형 퇴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은 약화될 수 있지만 저금리 환경으로 연금 수익률이 낮은 상황에서 현 근로자들의 은퇴저축을 장려할 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선택권을 확대함으로써 효용을 증진시키고 연금보험 시장의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연금시장을 활성화시키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생명보험회사가 연금수요 확대를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면 소비자 니즈에 맞는 다양한 신상품 개발을 통해 연금시장 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다.

물론 이번 개혁안이 영국의 연금시장을 위축시킬 우려도 존재한다.

은퇴자의 연금상품 수요가 감소할 경우 연금시장의 역선택 확대로 보험료가 인상되고 연금 시장이 위축될 가능성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선택권 확보는 노후소득 상품의 복잡성으로 불완전판매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며 은퇴자들의 선택권이 확대되더라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노후소득 상품의 장단점을 충분히 파악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할 경우 불완전판매 또는 사기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1986년 영국 정부가 근로자의 퇴직연금 강제가입을 완화하도록 제도를 변경한 후 연금판매인들이 수수료가 더 높은 개인연금 가입을 유도하면서 많은 은퇴자가 불완전판매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다.

OECD도 영국의 퇴직연금제도 변화에 대해 은퇴자들의 노후소득 보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OECD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공적연금의 역할이 크지 않기 때문에 퇴직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강화해야 하지만 이번 제도 변화는 OECD의 권고에 역행하는 것으로 은퇴자들이 장수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는 점을 우려했다.

영국의 연금 연구기관(Pensions Institute)도 종신연금은 DC형 퇴직연금제도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고 지적하고 이번 제도 변화가 은퇴자에게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DC형 연금제도의 본분을 망각한 조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 세제유인 강화로 연금수령 장려해야
우리나라는 퇴직연금 적립금의 일시금 수령에 제약이 없지만 연금수령을 장려하는 세제유인도 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은 퇴직소득을 근로소득과 동일한 방식으로 과세하는 주요 선진국과 달리 분류과세를 통해 예외적으로 낮은 세율로 과세하고 있다.

총급여 3500만원, 7000만원인 은퇴자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할 경우를 비교해보면 실효세율은 각각 2.4%, 3.1%로 연금수령 시 세율 3.3%에 비해 일시금 수령이 세제 측면에서 오히려 유리하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금지급 비율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4%대로 매우 낮은 수준이며 이는 퇴직연금의 연금지급 유인이 크지 않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중 연금 수급요건을 갖춘 55세 이상 퇴직자(약 3만4000명) 중 연금 수급자는 4.8%(1611명)로 나타났으며 이는 2013년 말 3.0%에 비해서는 높아졌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금융업권별로 연금지급 비율을 비교해보면 종신연금 상품을 구비하고 있는 생명보험업권의 경우도 연금지급 비중이 6.6%에 그치고 있으며, 손해보험의 경우 업권 중 가장 낮은 2.2%를 나타내는 등 모든 업권에서 연금지급 비중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는 일시금 수령과 연금지급 이외의 지급방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금의 대안으로 노후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이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연금지급기간이 5년 이상으로 규정돼 연금지급을 선택하더라도 단기에 적립금을 소진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일시금 선호는 노후소득 보장 측면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영국의 사례를 감안할 때 일시금 선택을 제한하는 조치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금리로 종신연금 상품의 보장기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연금화를 강제하는 것은 자칫 은퇴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현 근로자의 은퇴저축 유인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김 연구원은 “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의 연금전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일시금 인출을 제한하는 조치보다는 퇴직연금 적립금 인출 시 연금선택을 디폴트 옵션으로 설정하거나 연금 선택 시 세제상의 유인을 강화하는 방안 등이 현실적”이라며 “다양한 지급방식을 제공하고 은퇴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제공과 교육이 보다 강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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