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수 여신금융협회장

체제의 계급장 ‘플라스틱 머니’ 소멸 운명
모바일 혁명 대비한 협회 차원 대책 고심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플라스틱 머니라고도 불렸던 신용카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신업계 전체가 그 미래는 다 알고 있지만, 예상한 경로대로 걸어갈지 아직은 확답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국내에 신용카드가 첫 선을 보인 때는 1969년. 백화점 카드의 형태였다. 그리고 은행들이 신용카드 사업부를 신설하던 시절은 1980년이 최초였다. 당시 국민은행이 그 시작이었고 2년 뒤 지금은 신한은행에 합병된 조흥은행 등 5개 은행이 은행신용카드협회(BC카드)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신용카드 시장을 개막했다.

80년대 신용카드는 여유 있는 중산층의 계급장이자 성공한 사람들의 신분증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런 신용카드가 전 국민의 손에 한 장 이상 쥐어진 시점은 1999년일 것이다. 신용카드 거래에 대한 소득공제가 이뤄지면서 신용거래액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1976년에 쓴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미국에서의 1950년대 신용카드에 의한 분할 지불 방식을 “돈을 빌리는 일에 공포감을 품고 있던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에 최대의 공격을 가한 것”이라고 비평한 바 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임하던 미국은 쇼핑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본격 개막했다. 오일파동이 발생하는 70년대 중반까지 미국 사회에서 신용카드의 등급은 자신을 드러내는 체제의 신분증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화점 경영자였던 알프레드 블루밍데일이 다이너스클럽 카드를 1946년 만들면서 본격적인 시작된 신용거래 사회. 이후 1958년 아메리칸익스프레스와 까르뜨블랑슈가 경쟁에 뛰어들었고, 아메리카은행과 체이스맨해튼 은행이 거의 동시에 참여하면서 시장은 급성장했다.

이렇게 발전했던 카드가 2000년대 한국에서도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며 시장을 키워갔던 것이다. 당시의 신문들은 신용카드를 ‘현대인의 필수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소비에 대한 광풍이 신용카드와 결합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부채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켰다면 한국에선 신용카드 거래의 소득공제가 외상거래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사람만 바보 만드는 이상한 소비구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2016년, 여신업계는 초비상이다. 카드의 운명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새로 취임한 김덕수 여신금융협회장(전 KB국민카드 사장)의 일성은 “규제 완화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이다.

조선, 해운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증가 여파라는 국내의 불안요인, 그리고 브렉시트와 미국의 금리인상 등의 해외요인 등은 중단기적으로 금융시장 전체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카드업계가 맞이한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과 가맹점 수수료 인하 등의 리스크는 여신기업 고유의 불안요소이다.

이런 리스크가 기업의 운명 전체를 좌우할 만큼 불안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김 신임회장은 이와 관련한 규제 완화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플라스틱 머니가 신용거래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수익원도 창출해야 하고, 그 수익원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내 카드사의 이익구조를 개선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회장이 협회장으로서 어디까지 대안을 제시할지 아직 예측할 수는 없다. 오프라인 소비패턴이 온라인으로 이행하면서 플라스틱 머니는 앱머니 형태로 빠르게 이행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앱카드는 대세를 형성했으며, 스마트폰이 플라스틱 카드를 조만간 대체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지점은 우리는 여전히 쇼핑몰과 광고, 그리고 신용카드가 ‘소비’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결제의 수단은 바뀔 수 있지만, 그래서 매체가 변할 수 있지만 패턴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법. 그리고 협회가 회원사들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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